시로 여는 일상

이장욱 표백

생게사부르 2018. 3. 12. 21:07

이장욱


표백



나는 어딘지 몸의 빛깔이 변했는데
내가 많이 거무스름하였다. 끌고 다닐 수 없어서
잘 표백을 시키고

너무 백색이 된 뒤에는 침묵하였다. 당신이 추측을 했는데 저
것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존재해도 허공을 닮을 뿐입
니다 저런 것을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나도 나를 의아해하였다. 있다가 점점 보이지 않는 것이
모든 것에 흡사하다고.
그래도 나에게 많은 것이 떠오르는데 가령
당신의 키와 면적
호주머니 속의 빈손
먼 불행의 접근
죽은 친구

결국 발바닥이 온몸을 지탱하는 것이다. 발끝은 아니지만 발끝
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거울은 아니지만 등을 보여주는 것이다. 골
목이 아니지만 막다른 곳에 이르러
한꺼번에 거대해지는 것이다.

밤과 비슷한 것들로서. 소리라든가 공기라든가 시간과 같이 무섭
게 스며들어 고요하다가
뜻밖의 곳에서 확대되는 것들로서.

나는 천천히 표백되었다. 조금씩 모든 것이 되었다. 나는
나를 끌고 다닐 수가 없어서

 

 

     2015. 여름.<시인동네>

 

 

 

 

1968년서울

1994년 문학잡지 '현대문학' 등단

    수상 : 2016 제24회 대산문학상 시 부문  외 6건
    경력: 2014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외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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