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식품이라... 쩝
이전부터 ' 물 좋은 마산에 몽고 간장...이래 선전 해 쌓더마...
( 물론 무학 소주도 물 사용과 관련 있는 제품이라 이런 선전 했고요.
또 소주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계기도 고려시대 몽고병사들이 마시면서 였다고 합니다.)
몽고간장 식품회사 전 명예회장의 슈퍼갑질 논란...전 명예회장님 인격이 높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실수야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인데...일이 흘러가는 걸 보면 결코 실수가 아닌
설흔 하나에 사장이 되었다는 창업 2대 회장님 본 성정이 그런 모양입니다.
그러나 사과 기자회견을 하고도 진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제 3, 4의 피해자가 나타나면서 해결이 아니라
더 확산이되고 있고, 결국 소비자들의 불매운동을 차단해서 회사의 불이익을 막아보고자 하는
얄팍한 사과였다고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네요.
최초 문제가 되어 지방언론을 거쳐 중앙지까지 보도가 되고
부랴부랴 사과까지 했건만 결국 마음에서 우러난 진정한 사과가 아니었던지....
지방은 늘 변방인셈이지만 그래도 백년도 더 된 향토기업 하나가 창업주 대표에 의해 곤란을 당하니 영 딱합니다.
더구나 몽고간장 회사 바로 옆에 '정의로운 마산정신'을 보여주는 3.15의거 탑이 있기에
개인의 잘못에서 비롯된 일이지만 '마산정신'이 다소 훼손되는 기분도 듭니다.
무학초등학교 담벼락과 맞닿아 있는 몽고식품 창업비
마산시, 고려시대 옛 이름은 합포
중국대륙을 통일하고 현재 유럽, 러시아까지 정벌했던 징키즈 칸, 대원제국은 요즘으로 치면 미국같은 나라였습니다.
고려 역시 세조 쿠빌라이 침략을 받습니다.
당시는 문벌귀족사회가 무너지고 무신정권기여서 세계 대 제국인 몽고에 항복을 안 하고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40년 가까이 버티고 싸웁니다 (첫 침략 1231, 강화천도 1232- 1270년 개경환도)
말이 40년이지 한 인간의 인생으로 치면 당시 수명이 지금보다 짧았던 점을 감안하면 거의 평생이
전쟁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전쟁 터진는 해 한 사람이 태어났다면 성장하여 청년이되고 장년이되기까지 징글징글하게 전쟁을 겪고
마흔이 넘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정부가 있는 강화도는 육지와 떨어져 있어서 그 직접적인 전화를 면했다고는 하지만
7차례 이상 몽고 말 발굽아래 국토유린은 물론 문화재 소실, 고통받는 백성들의 생활 또한 말이 아니었을겁니다.
무신정권이 끝나면서 몽고와 강화(항복)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를 하게 됩니다.
그 이후 80년 이상 몽고의 간섭을 받으면서 자주성이 유린되지요.
학교 다닐 때 국사시간에 많이 배운 내용들일 것입니다.
그 상실된 자주성을 회복하려는 공민왕의 개혁정치와 더불어서요.
원은 황해도와 철령이북의 영토를 지배 하는 것 부터(서경에 동녕부, 화주에 쌍성총관부 제주에 탐라 총관부 설치)
정동행성을 두어 일본 원정을 준비 시킵니다. 고려에 함선과 물자를 조달하고 군대도 동원하지요
몽고가 일본을 두번 치러 가는데 1차에 한족, 몽고 연합군 2만 5천에 고려군사 8천, 함선 900척이 합포 인근에 집결
쓰시마 이끼 거쳐 하카다까지 돌입했다가 태풍으로 실패했고
2차(1281)에 원 군사 3만, 고려군 1만에 뱃사공 1만 5천, 전함 900척이 동원되고
남송 출발 강남군 10만이 출발하나 역시 가미까제(新風)로 실패합니다.
합포는 낙동강 하류 세곡을 모아 개경으로올려 보내는 조창이 있었고, 지리적으로 고려와 일본을 잇는 교두보여서
고려시대 원과 일본 모두에게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습니다.
지금 마산시 정수장 일대에 군대가 머물면서 군인들과 말을 위한 식수를 위해 우물을 파게 되었고,
현재 남아 있는 몽고정(고려정)에서 나는 물로 간장을 만든다 하여 몽고간장이 된 것이지요.
무학 소주와 더불어 물좋은 마산의 명물이 되었습니다.
몽고식품 회사와 맞 닿아 있는 3.15의거 기념물들
제 생활권이라서 자주 지나 다닙니다.
또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 선거에 항의한 학생들이 거리로 진출하여 시위 하던 중
발포를 하여 희생자들이 생기는 곳이 몽고식품 회사 부근입니다.
옆에 무학초등학교와 이웃하여 있는 탓에 몽고 식품 창업비와 무학 초등학고 담벼락에
당시 총탄자국이 보존 되어 있습니다. 길 건너 3.15 의거탑이 세워져 있기도 하구요.
마산, 창원, 진해가 행정 통합이 되면서
마산과 진해는 어느분 말씀처럼 이사를 간 것도 아닌데 졸지에 주소가 바뀌어
창원시가 되어버렸고, 역사가 더 오래된 마산임에도 합포시청은 창졸간 구청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자유수출지역과 한일합섬 등이 번창할 때 전국 7대 도시일 정도로 번창했던 마산의 시민정신은
민주, 정의 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는18년 동안, 진해에 있는 이승만 별장을 드나들면서
마산은 잘 들리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마산은 야(野)성이 강한 도시였다고 할까요?
그런 마산에서 시장들이 줄을 이어 부정과 비리에 얽혀 불명에 퇴진 한 것과 맥락을 같이하면서
창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쇠락하는 도시가 되어 버렸습니다.
향토 기업회장님 소문은 이미 아는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성질이 뭣 같아서 부리는 기사들을 하인 대하듯이 하고 회장님 입장에서는 일년도 못가 갈아 치우는 것이고
기사들이 입장에서는 1년을 못 버티고 나간다고 하는 소문
나이 마흔만 넘어도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고 합니다.
인생을 잘 살아야 하는데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까지 소문이 날 정도면
언젠가는 터질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 시기가 언제이냐? ... 지금이 된 것이지요.
그분 말고도 지역토호 중에 성질이 불 같아서 결재를 하러 들어가서 마음에 안들면 뭐가 날라다닌다든지
아랫 사람들이 모시기가 어렵니 하는 얘기가 들리는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이전처럼 유교적 덕목이 남아 있어 무조건 나이만 들었다고 대접 해 주고 대접 받던 시대가 아닙니다.
젊은 시절이야 불평도 하고 비판도 하고 하지만 나이 들수록 젊은 사람들 눈에 어떻게 비칠까
신경이 쓰이면서 ' 나이 든 값' 하기가 쉽지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마을에 나이든 사람 한 사람이 있으면 도서관 한 개와 맞먹는 지혜를 얻을수 있다던 얘기
노년의 경험이 부디 젊은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고 지혜가 되어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멸시는 받지 않는 노년이 되어야 할터인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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