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여행/멕시코, 페루

숨겨졌던 공중도시 마추픽추

생게사부르 2017. 11. 27. 01:55

숨겨 졌던 공중도시 마추픽추 (Machu Picchu in Peru)  1.

 

 


 

 

 

 

 

 

 

 

초등시절, 아이들이 접할수 있었던 잡지책으로는 " 어깨동무' 가 있었고' 소년 조선일보'가 학교에 들어왔던 것 같습니다.

연재물 중에 ' 폼페이의 최후' ' 이스터 섬의 석상' 낙타를 이끈 대상들이 모래사막을 지나 동서양을 드나드는

얘기, ' 노아의 방주'와 관련한 지역이 실제 오늘 날 어디인지를 찾는 얘기 등을 읽으며 참으로

설렜던 기억이 납니다.

당연히 인간이 살아온 과거 얘기와 그들이 살았던 공간 유물유적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특히 국사보다는

세계사가 더 흥미롭고 재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일상과 직업에 발묶여 실제현장을 많이 찾지는 못했기에 이번 여행계획을 세우면서 딸이

엄마가 꼭 가야 할 곳 순위를 정하라고 할 때 마추픽추는 당연히 첫번째 순서가 되었고 딸도 동의했습니다.

 

 학창시절 사회교과서나 지리부도에서나 보던 '마추픽추'를 직접 가게되다니요.

 

마추픽추는 역사적 문화유산이기도 하지만 건축가들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나봅니다

한 건축가가 이렇게 표현 한 것을 보면요.

 

“깊고 깊은 계곡 위에 세워진 이 도시는 자연의 우주적 광경이다. 의례 같은 우아함, 그 돌들이 토해내는 영원의 표현 속에

성스러운 장소로서의 중요한 역할이 반영되어 있다. 안데스의 고봉들이 펼치는 환상적인 세계에 보석처럼 꼭 끼워진

잉카인들의 가장 위대한 유물이다.”

 

학자들은 태양신의 후예로 숭배 받은 잉카제국의 아홉 번째 통치자인 파차쿠텍이 마추픽추를 건설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하지만 만코 카팍이 “내가 태어난 곳에 세 개의 창이 있는 석조 벽을 세우라”고 한 명령과

마추픽추에 남아 있는  ‘세 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을 근거로

만코 카팍이 세운 잉카 최초의 수도라고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한 중앙에 서 있는 나무

 

 

어떻든 12세기 초 만코 카팍(Manco Capac)의 아들 신치 로카(Sinchi Roca)가 그의 누이동생

마마 쿠라(Mama Cura)를 왕비로 맞으면서 잉카는 신화가 아닌 역사가 됩니다.

 

로카왕의 손자 마이타 카팍(Mayta Capac) 시대에 지배 면적이 확대되었고 제9대

파차쿠티 유판키(Pachacuti Yupanqui, 1438~1471) 시대에는 인구가 110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16세기 초에는 안데스산맥에서 태평양 해안에 이르기까지 면적 10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할 정도로

 대제국이 되었고 황제를 정점으로 정치와 사회제도도 정비되었습니다.

 

문자가 없어서 읽고 쓰지를 못했기에 정확한 역사기록이 없어서 더 신비하고 추정에 의할 수 밖에 없지만

  ‘키푸(quipu)’라는 결승문자(結繩文字)를 사용하여 노끈의 빛깔이나 매듭으로 여러 가지 뜻을 표시했고 

동물의 힘을 빌리거나 바퀴를 사용하지 않고 도로 · 계곡을 잇는 적교(吊橋) · 농업용수로 · 거대한 성채를 비롯하여

궁전과 신전을 건설하기도 했습니다.

 

의사계급이 있었고 국가가 고용한 약초 채집자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잉카의 의학 · 식물학 지식 수준은

 대단했던 것으로 여겨지며 의사들은 절단수술을 했고 응급상황에서는 두개골에 구멍을 뚫는 수술도 감행했다고

보여지며 고대 이집트인들처럼 미라 제작술을 터득하고 있었다고 추정합니다.

 

 

 

 

 

 

 

마추픽추에서 자라는 식물들 중에 코카 잎을 볼수 있었습니다.

 

 

 

 

 

 

 

 

 

 

아구아스 칼리엔떼서 버스로 꼬불꼬불한 길을 30분 정도 달려오면(걸어 올라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추픽추 입구에

닿는데 유적지 들어가기 전에 화장실(유료)과 카페가 입구에 하나 있으며 인풋과 아웃풋이 허용되지 않는 공간으로

관리되며 또 그렇게 해야 유적이 온전히 보존이 될수 있을 터입니다.

 

잉카인들은 제국 안에서 나는 금으로 찬란한 황금문화를 꽃피웠다고 흔히 전해집니다.

 구리나 놋쇠를 쓰듯이 황금이 풍부했으며 그들이 숭배하던 태양신을 모시는데 황금을 아낌없이 사용했다고도 하는데

어떻게 보면 풍부했던 황금이 결국 화근이 된게 아닌가 여겨지기도 합니다.

국민국가와 산업사회로 들어가던 유럽이 ' 황금'을 얻기 위해 무력을 앞세워 미지의 대륙을 개척하러 나서기 시작하니까요.

 

 

잉카인의 의식

 

 

에스파냐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 1475~1541)가 이끄는 200여 명의 군사가 잉카제국에

들이닥쳐 잉카의 황제를 죽이고 잉카제국을 멸망시키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황금도시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합니다.

마지막 황제 아마루(에스파냐군에 의해 황제로 옹립된 만코 2세의 아들)가 엄청난 보물을 잉카의 마지막 수도

빌카밤바 어딘가에 숨겨놓았다는 내용이지요.

 

에스파냐 군사들은 빌카밤바를 찾기 위해 혈안이었지만 빌카밤바가 어디인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습니다.

에스파냐 군사에게 사로잡힌 잉카인들도 빌카밤바가 어디인지 밝히지 않으면서 소문이 꼬리를 물면서 신비만 더해가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풍문으로 도는 '황금에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빌카밤바를 찾으러 아마존 밀림으로

들어갔고 대부분 살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황금의 도시를 찾기 시작한 지 200여 년이 지난 1768년 초케키라오가 빌카밤바란 소문이 퍼졌습니다.

초케키라오는 푸리마 항구에서 가까운 험준한 산속에 있는 유적입니다.

 

 

초케키라오

 

 

1909년 미국 예일대학교의 하이럼 빙엄(Hiram Bingham, 1875~1956)은 빌카밤바를 찾기 위해 아푸리막강

 유역의 험한 밀림 속을 탐험하다 초케키라오의 유적을 발견했습니다.

그곳에는 낭떠러지 위에 우뚝 솟은 궁전과 방형의 제의(祭儀) 광장, 약탈자들에게 짓밟힌 신전들이 있었습니다.

 

 “이 성채야 말로 잉카제국 최후의 비밀 수도였으며 방대한 재보가 어디엔가 잠들어 있을 것”

이라 생각하며 초케키라오가 만코 2세의 빌카밤바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초케키라오의 지형이 빌카밤바를 묘사한

 자료들과 일치하지 않자 빙엄은 1911년 다시 페루를 찾아 탐험을 계속했습니다.

 

 

                                              

하이럼 빙엄

 

 

1912년 발견 당시의 마추픽추

 

 

 

 

 

토착 인디언의 안내를 받은 빙엄은 피사로를 피해 만코 2세가 탈출한 길을 더듬어 나갔고 산봉우리에 있는

폐허의 도시를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그가 마추픽추를 발견 한 순간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인적이 전혀 없는 숲 쪽으로 길을 잡았다. 갑자기 폐허가 된 집들의 벽이 눈에 들어왔다.

잉카 최고의 석조 기술로 지은 집들이었다.

······ 정교하게 다듬은 마름돌들이 정확하게 맞물린 벽들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산 정상에, 험준한 계곡과 가파른 절벽에 기대어 숨어 있는 신비의 공중 도시 맞추픽추! 는 이렇게 발견된 것입니다

 

맞은 편에 있는 ' 젊은 봉우리' 라는 뜻의 '와이나픽추'에 비해 '마추픽추'는 '나이 든 봉우리'라는 뜻이며

2개의 뾰족한 봉우리 사이 말안장 모양의 지역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산자락에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스페인 침략자들에게도 발견되지 않았기에 잉카 제국의 '잃어버린 도시' 혹은' 공중 도시'라고 불립니다.

 

 

마추픽추는 잉카의 수도 쿠스코에서 우르밤바강(아마존강의 원류)을 따라 북서쪽으로 114킬로미터 올라간

 지점에 건설되었으며 해발 2280미터 위치에 있습니다.

 

꼬불꼬불한 산을 돌아 돌아 산 정상에서 만나게 되는 마추픽추는 높이 5미터, 두께 1.8미터의 성벽으로 두텁게

싸여 있는 요새 도시이며 최대 인구 2만 명이 사는 게 가능했다는 이런 거대 도시를 어떻게 산꼭대기에

정교하게 만들어 놓았는지 왜 만들었는지가 불가사의 한 것이지요.

 

 

잉카 시대의 성채나 취락 중에서 가장 큰 규모로 완전하게 남아 있는 유적으로, 후기 잉카의 토기나

 금속으로 된 그릇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전에 세워진 도시로 마추픽추처럼 거의 사람의 손이 미치지 않은 곳은 드물며

 페루에서 잉카 문명의 흔적이 가장 완벽하게 남아 있는 세계적인 유적입니다.

 

빌카밤바든 비트코스든 잉카 제국이 어마어마하게 보유했던 금은보화가 감추어진 마지막 도시라고 알려진 곳,

 빙엄은 그곳을 찾았다고 생각했던 거지요. 물론 황금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세계는 잉카 제국 멸망 후 340년 동안 버려졌던 귀하고 값진 잉카 제국의 유적을  만나게 되었지요

 

 

' 신성한 광장' 잉카인들의 건축기술이 여실히 나타나는 흔적들 

 

 

마추픽추는 가운데 있는 대광장을 중심으로 상부와 하부로 크게 나누어져 있으며

지금 우리가 사는 현대 도시 못지않게 여러 가지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궁전이 있고, 신을 모시는 신전이 있고 의식에 사용되는 의례품을 저장하는 저장소가 있었습니다.

또 학교와 공장, 사람들이 살던 집, 묘지, 산을 계단식으로 깎아 옥수수와 약초를 재배하던 경작지도 있었지요.

천체 관측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 건축물도 빼놓을 수 없어요

 

사람들이 살았던 집을 좀 더 자세히 보면 안데스 고원 지대의 둥근 가옥과는 달리 벽돌로 쌓은 양쪽 벽 위에

∧자형으로 초가지붕을 얹어 놓았어요.

그리고 왕의 궁전이라 불리는 건물 문 입구에 나 있는 두 개의 구멍이 손을 넣어 채워 두는 장치로

밝혀져 감옥으로 사용된 흔적이라고 추측합니다.

 

 

 

  

우리는 한번 스쳐 지나지만 여기서 살고 있는 라마

 

 

관광객들은 한번 거쳐가면 추억 속에나 남지만 이 곳에 살고 있는 라마

제대로 사진 한번 찍겠다고 고개 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지만 기회가 잘 포착되는 게 아닙니다

빈정 상하면(?) 퉤퉤 옆으로 침을 뱉기도 하고요. 아래로는 우르밤바 계곡이 보이네요.

시누이가 어렵게 고개든 사진 포착, 눈이 초롱한 게 귀엽습니다

 

 

 

 

작업중인 인부들

 

 

 

 

 

 

잉카 사회의 주요 범죄는 도둑질과 거짓말 그리고 게으름 같은 것이랍니다 

생활환경이 제한되고 여건이 어려운 산 정상의 마추픽추에서는 자기가 맡은 일을 게을리 하는 것은 전체 공동체의 생존 자체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무거운 벌로 다루어졌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높은 산꼭대기에는 과학적으로 잘 만들어진 수로와 17군데나 되는 양수장도 보입니다.

산에서는 물이 귀하기 때문에 한 방울의 물도 헛되이 버려지지 않도록 식수로 사용할 물과 농사짓는 데 쓸 물을

나누고 재사용할 수 있도록 고안된 시설이 잉카인의 지혜를 가늠할 수 있게합니다.

 

 

 

 

 

마추픽추에서의 식수 이용은 다른 잉카 유적과 같은 방식으로 정교하게 돌 틈을 깎아

 도시 전체에 물을 흐르게 하여 높은 산악 생활에서도 비교적 물을 자유롭게 사용 했으며 위에서는 상수로 사용 한 이후

아래로 내려오며 하수로 재사용하는 등 엄청 발전된 수로 시설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수로와 양수장 말고도 마추픽추에는 놀랄 일이 많이 있는데 마추픽추의 상부 지역 대신전 앞

네모난 돌기둥 위에 서 있는 해시계가 그 하나입니다.

 

 지구의 남반구에 위치해 있는 잉카는 6월 21일 동지를 새해로, 12월에 하지를 맞는데 돌기둥 모서리를 잇는

대각선 위로 6월의 동지의 태양이 정확하게 통과하도록 설계되어 있답니다.

 

 

인티와티나

 

 

 

사진 일부와 글 내용 ' 처음 만나는 세계 문명 ' 이희수와 

 ' 세계의 불가사의 여행' 이종호. 현암사에서 가져 온 내용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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