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미
개인적인 비
각자의 지붕 아래서 맞닿았지 품
속의 작은 단도들이 차르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세계의 그림자를 짚어내며
빛을 빚는 비. 묽은 촛불들을 곳곳에
사르며 사라지는 비.
비는 옮아가는 질병인가. 휘몰아치는
눈썹들인가. 갈피를 놓친 낱장들인가.
검은 반지를 깨뜨리고 나오는 반투명의
손가락들. 오늘은 약속을 팽개친 손들이
아주 많아
겹쳐지며 각자를 밀어내는 지붕
밑에서. 우산마다 소분하여 보관하던
하루치의 강수량을 꺼내 펼치면
그곳은 나의 영토이지 너의 시간이
아니야. 너의 다정, 너의 귀가, 너의
얼룩진 셔츠 소매사이로 흘러나오는
희고 무른 손가락들
우리는 아름답게 걷는다 근사하지만
하나는 아니야. 우산이 언제나 비보다
느리듯 생각은 늘 피보다 느리고
근사하다는 건 가깝다는 것. 나는
하얗고 너는 희다. 나는 혼자이고 너는
하나뿐이다. 비슷하지만 같은 건
아니야. 우리는 서로의 지붕에 지붕을
보태며 지속되는 빗속을 조금씩 가깝게
걸어간다
이혜미: 1988. 경기 안양
2006. 중앙신인문학상 등단
시집 『보라의 바깥』『뜻밖의 바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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