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순
가장 안쪽
잠시 잠깐 뻐꾸기 울음을 멈춘 사이
삼백 평 감귤밭에 삼천 평 노을이 왔다
넘치는 감귤꽃 향기 더는 감당 못하겠다
이렇게 내가 나를 이기지 못하는 시간
하루 일상 시시콜콜 어머니 전화가 온다
말끝에 작별 인사를 유언이듯 하신다
어제는 방석 안에, 오늘은 속곳 속에
당신의 장례비를 꽁꽁 숨겨두었단다
치매기 언뜻 스며든,
세상의 가장 안쪽
갑마장길 4
- 타래난초
벌초하고 묘제나 해라
빌려 쓰는 산마장
한라산 흘러 내린 민오름 붉은오름
그 위에 걸린 구름도 통째로 빌려 쓴다
오름 능선 건널 때는 말이 말을 거느린다
일렁일렁 억새무리 일렬로 건너간다
이맘쯤 타래난초도 타래타래 따라간다
감겼다면 풀리지 않는 생이 어디 있을까
감긴 채로 피는 꽃도 저렇게 눈부신 것을
내 동생 등만 쓸어도 말 울음 날 것 같다
갑마장길 6
아직도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는 거다
겨우내 다 못 내린 듬성듬성 빨간 열매
어쩌면 마지막 공양 허적뿐인 청미래 덩굴
석수장이 내 아버지 산마장 돌아오면
돌담도 시오리길 덤불담도 따라온다
굽이진 생의 한 편도 잣성처럼 따라온다
하얀 말울음 같은 삘기꽃 한 무리
너울 너울 춤사위 흩어지는 저물녘
봄 하루,
그 일기장엔 어떤 고백 쓰셨을까
1965. 제주
시집: 꽃과 장물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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