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 남진우
늙은 왕은 죽고
젊은 왕비 홀로 텅빈 궁전에 남았다
신하와 궁녀들이 다 떠나간 기나긴 낭하를 따라
어디선가 불어온 모래바람이
굶주린 짐승 울음소리를 내며 불어오고 불어갔다
왕비는 금간 화병의 꽃처럼 내실에서 서서히 시들어 갔다
수세기가 지난 후
끝없는 모래가 펼쳐진 황막한 사막 한복판에서
거대한 짐승의 뼈가 발굴되었다
두개골에서 꼬리뼈까지 고스란히 남겨진 짐승의
돌처럼 굳은 골조를 들어내다 늙은 학자는
갈비뼈 안쪽에서 너무도 생생한 꽃잎 한점을 떼어냈다
달
밤 하늘에 둥근 유골단지가 떠 있다
유골 단지에서 뼛가루가 쏟아져 나와 사방에 흩날린다
아우성치듯 봄밤의 거리를 떠도는 꽃가루들
박하향기 나는 달빛을 마시면
몸 속에 꽃 가루가 들어찬다 숨쉬는 것조차 힘겨운 이 밤
내 죽음을 예고하는 꽃가루의 소용돌이
밤하늘 여기저기 상처처럼 입 벌리고 있는 묘혈들이
저마다 푸르스름한 빛을 뿜어낸다
죽음의 힘으로
한사코 자신을 밝히는 저 목마른 존재들
달빛을 다 퍼내고 난 뒤
유골단지는 텅 빈다
남진우:1960. 전북전주
1981. 동아일보 신춘문예
1983. 조선일보 문학평론 등단
시집: ' 타오르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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