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남진우 전설

생게사부르 2017. 8. 21. 23:54


 

전설 / 남진우



늙은 왕은 죽고

젊은 왕비 홀로 텅빈 궁전에 남았다

신하와 궁녀들이 다 떠나간 기나긴 낭하를 따라

어디선가 불어온 모래바람이

굶주린 짐승 울음소리를 내며 불어오고 불어갔다

왕비는 금간 화병의 꽃처럼 내실에서 서서히 시들어 갔다

수세기가 지난 후

끝없는 모래가 펼쳐진 황막한 사막 한복판에서

거대한 짐승의 뼈가 발굴되었다

두개골에서 꼬리뼈까지 고스란히 남겨진 짐승의

돌처럼 굳은 골조를 들어내다 늙은 학자는

갈비뼈 안쪽에서 너무도 생생한 꽃잎 한점을 떼어냈다

 

 

 

 

 

 

밤 하늘에 둥근 유골단지가 떠 있다

유골 단지에서 뼛가루가 쏟아져 나와 사방에 흩날린다

아우치듯 봄밤의 거리를 떠도는 꽃가루들

 

박하향기 나는 달빛을 마시면

몸 속에 꽃 가루가 들어찬다 숨쉬는 것조차 힘겨운 이 밤

내 죽음을 예고하는 꽃가루의 소용돌이

하늘 여기저기 상처처럼 입 벌리고 있는 묘혈들이

저마다 푸르스름한 빛을 뿜어낸다

 

죽음의 힘으로

한사코 자신을 밝히는 저 목마른 존재들

달빛을 다 퍼내고 난 뒤

유골단지는 텅 빈다

 

 

 

남진우:1960. 전북전주

          1981. 동아일보 신춘문예

          1983. 조선일보 문학평론 등단


시집: ' 타오르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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