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림
아무것도 아니었지
너는 아무것도 아니었지.
순식간에 불타는 장작이 되고
네 몸은 흰 연기로 흩어지리라.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지.
일회용 건전지 버려지듯 쉽게
버려지고 마음만 지상에 남아
돌멩이로 구르리라.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도 괜찮고
옷에 떨어진 단추라도 괜찮고
아파트 풀밭에 피어난 도라지라도 괜찮지.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의 힘을 안다.
그 얇은 한지의 아름다움을
그 가는 거미줄의 힘을
그 가벼운 눈물의 무거움을
아무것도 아닌 것의 의미를 찾아가면
아무것도 아닌 슬픔의 깊은 의미를 만들고
더 깊게 지상에 뿌리를 박으리라.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낄 때
비로소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무엇이든 다시 시작하리라.
- 시집 『해질녘에 아픈 사람』(민음사, 2004)
1961. 경기 의왕시
1990. 시 '초록말을 타고 문득' 등단
* * *
아무것도 아닌 것의 힘
중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공부만 잘 하면 뭔가 큰 인물이 될 듯한
대학만 가면, 취업만 되면, 승진만 되면...
특히 우리나라에서와 같은 학벌 지상주의 풍토에서는 이를테면 ' 서울 대학교' 만 나오면
세상을 다 얻을 것만 같은...
그러나 한 해 서울 대학교에 입학하는 사람이 몇 명이며 또 졸업하는 사람은 몇 명인가
우리나라에서는 ' 서울 대학교' 라지만 세계 150위권 안에 드느니 들지 못하느니
내가 좀 똑똑하다느니
내가 좀 잘 났다느니... 다 상대적인 개념이어서
좀 똑똑하고 좀 잘난 것 같지만 더 똑똑하고 더 잘난 사람을 만나면 순간 나는 또 아무것도 아니어서
학생들에게 자주 그렇게 얘기 하곤 했습니다.
공부 좀 잘 하는 학생들 '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 덕분에 니들이 돋 보이는 것이며
(공부를 다 잘하면 잘하는 게 자랑이 되지 못하겠지요)
자기가 좀 예쁘다고 못 난 친구 무시하는 학생들, 자신이 무시하는 친구들 덕분에 자기가 돋보이는 것이니
그 아이들에게 진정 감사하라고요
경쟁이 유달리 심한 사회, 유독 일등만 기억하는 사회, 과정이 아니라 결과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나타나는
여러 부작용일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사소한 것의 힘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 진리의 반은 이미 획득하고 있다고 보면 과장일까요?
능력 있는 것도 대단하고, 예쁜 것도 대단하고 사회적으로 성취해서 유명인으로 사는 것도 사실 대단하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대단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 다 대단한 것이지요.
그리고 두드러진 것에서 보다 오히려 대단하지 않은 것들이 훨씬 끈기있는 생명력일 수 있겠지요.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무엇이든 다시 시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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