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우주의보 / 박준
이틀 내내 비가 왔다
미인은 김치를 자르던 가위를 씻어
귀를 뒤덮은 내 이야기들을 자르기 시작했다
발 밑으로 떨어지는 머리카락이
꼭 오래된 누군가에게 받은 용서 같았다
이발소에 처음 취직 했더니
머리카락을 날리지 않고
바닥을 쓸어내는 것만 배웠다는
친구의 말도 떠 올랐다
미인은 내가 졸음을
그냥 지켜만 보는 것이 불만이었다
나는 미인이 새로 그리고 있는
유화 속이 어둡고 캄캄한 것들의
태(胎)가 자라는 것 같아 불만이었다
그날 우리는 책 속의 글자를
바꿔 읽는 놀이를 하다가 잠이 들었다
미인도 나도
흔들리는 마음들에게
빌려 온 것이 적지 않아 보였다
<당신의 이름을 빌려다가 며칠은 먹었다>
2015.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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