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욱
나의 길이
나는 쉽게 길어진다.
예측불허의
이야기 같다.
하지만 할일은 자꾸만 저쪽에 있다.
힘껏 던져버려도
교실은 그대로 사각형이고
창밖으로는 대신
그림자가 조용히 늘어지고
나는 여전히 노란 완장을 찬 채
아무렇게나 굽이쳐도 상관 없는
등뼈를 따라 걸어간다.
유관순 양과 복도에서 마주치면
가볍게 목례를 해야지.
오늘 세상에 한 번뿐인 기념일.
생각은 내가 가는 쪽으로 흐르고
네가 누구더라도
나는 너와 나이가 같다
축, 생일
이목구비는 대부분의 시간을 제멋대로 존재하다가
오늘은 나를 위해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렇지만 나는 정돈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나는 내가 되어가고
나는 나를
좋아하고 싶어지지만
이런 어색한 시간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점점 갓 지은 밥 냄새에 미쳐간다.
내 삶은 나보다 오래 지속 될 것만 같다.
1794. 강원도 춘천
1998. 세계일보 신춘 문예
시집: 간결한 배치(2005), 생물성(2009)
산문집: 비성년열전 (2012)
* * *
' 나는 쉽게 길어진다.
예측 불허의
이야기 같다. '
신해욱의 두번째 시집 ' 생물성'
머리칼은 제 각각의 각도로 / 오늘을 잊지 못할 것이고
손금은 제멋대로 흐르다가 / 제멋대로 사라지고
' 나'는 자꾸만 나로부터 멀어지고 달아나고
' 지금' '여기' 와는 다른 시간이 흐르고,
나로부터 달아나는 이목구비가 있고...
나로 말하면
옷을 사면 팔 길이를 잘라야 하고
죽죽 뻗은 신세대 다리길이를 기준으로 할 때 바지길이의 1/3을 잘라야 할 때도 있다
자원을 절약하는 삶이라 스스로 위로하면서
늘어진 그림자,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거인이 되어보는 오전무렵의 그림자,
또 하나의 나를 통해 결핍과 부족을 얼마간이라도 보상받는 심정일지....
이렇든 저렇든 ' 갓 지은 밥 냄새에 미쳐'보면
이 생에서 주어진 삶의 길이가 어떠하든간에 한 세상 건널 수 있을 것이다.
自害하지 않고...
'시로 여는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화진 두 장의 유리판 사이에 물기가 있을 때처럼 (0) | 2017.06.07 |
---|---|
최정례 칼과 칸나꽃 (0) | 2017.06.06 |
조은 그늘 (0) | 2017.06.04 |
마경덕 놀란흙 (0) | 2017.06.03 |
조은, 땅은 주검을 호락호락 받아 주지 않는다 (0) | 2017.06.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