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최정례 칼과 칸나꽃

생게사부르 2017. 6. 6. 00:13

칼과 칸나꽃 / 최정례


 

는 칼자루를 쥐었고
그래 나는 재빨리 목을 들이민다
칼 자루를 쥔 것은 내가 아닌 너이므로
휘두르는 칼날을 바라봐야 하는 것은
네가 아닌 나이므로

너와 나 이야기의 끝장에 마침
막 지고 있는 칸나꽃이 있다

칸나꽃이 칸나꽃임을 이기기 위해
칸나꽃으로 지고 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슬퍼하자 실컷
첫날은 슬프고
둘째 날도 슬프고
셋째 날 또한 슬플테지만
슬픔의 첫째 날이 슬픔의 둘째 날에게 가 무너지고
슬픔의 둘째 날이 슬픔의 셋째 날에게 가 무너지고
슬픔의 셋째 날이 다시 쓰러지는 걸
슬픔의 넷째 날이 되어 바라보자

상갓집의 국숫발은 불어 터지고
화투장의 사슴은 뛴다
울던 사람은 통곡을 멈추고
국숫발을 빤다

오래가지 못하는 슬픔을 위하여
끝까지 쓰러지자
슬픔이 칸나에게로 가
무너지는 걸 바라보자



1955. 경기화성
1990. 현대시학 등단
시집: 내 귓속의 장대 나무 숲(1994), 햇빛 속에 호랑이(1998), 붉은 밭(2001),

레바논 감정(2006),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2011)
개천은 용의 홈타운(2015)

 

 

*      *      *

 

현충일입니다.

이 땅 곳곳에 묻혀 있는 순국한 이들,

아버지이거나 아들이거나 삼촌일...

 

막연한 역사 속의 인물이 아닌 가족분들께는 위로를

고귀한 희생을 바치신 분들께는

심장같고 핏빛 같은 붉은 칸나꽃을 바칩니다.

 

꽃말은 ' 견실한 최후' '행복한 종말' '존경'이네요.

 

표현력 약하고 감정이 둔한 저에게 있어 ' 존경' 은 최고의 찬사입니다.

감정 둔하고 표현력 약한 것은 시인으로서 타고난 자질은 없다는 뜻입니다.

다만 이 나이에라도 그 단점을 얼마간 보완해 보고 싶어서

안 되는 ' 詩'를 이렇게라도 붙들고 있음에 틀림 없습니다.

 

 

 

 

사진 출처: 다음백과 꽃나무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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