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심보선 식후에 이별하다

생게사부르 2017. 5. 23. 00:31

심보선


식후에 이별하다

 


 

하나의 이야기를 마무리 했으니
이제 이별이다 그대여
고요한 풍경이 싫어졌다
아무리 휘저어도 끝내 제 자리로 돌아오는
이를 테면 수저 자국이 서서히 사라지는 흰죽 같은 것
그런 것들은 도무지 재미가 없다

 

거리는 식당 메뉴가 펼쳐쳤다 접히듯 간결하게 낮밤을 바꾼다
나는 저기 번져오는 어둠 속으로 사라질 테니
그대는 남아 있는 환함 쪽으로 등 돌리고
열까지 세라
열까지 세고 뒤돌아보면
나를 집어 삼킨 어둠의 잇몸
그대 유순한 광대뼈에 물컹 만져지리라

착한 그대여

내가 그대 심장을 정확히 겨누어 쏜 총알을

작 익은 밥알로 잘도 받아 먹는 그대여

선한 천성天性의 소리가 있다면

그것은 이를테면

내가 죽 한 그릇 뚝딱 비울 때까지 나를 바라모며

그대가 속으로 천천히 열까지 세는 소리

안 들려도 잘 들리는 소리

기어이 들리고야 마는 소리

단단히 이마를 뚫고 맘속의 독한 죽을 휘젓는 소리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먹다 만 흰죽이 밥이 되고 밥은 도로 쌀이 되어

하루하루가 풍년인데

일 년 내내 허기 가시지 않는

이상한 나라에 이상한 기근 같은 것이다

우리의 오랜 기담奇談은 이제 여기서 끝이 난다

 

 

착한 그대여

착한 그대여

아직도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열을 셀 때까지 기어이 환한가

천 만 억을 세어도 나의 폐허는 빛나지 않는데

그 질퍽한 어둠의 죽을 게워 낼 줄 모르는데

 

 

<슬픔이 없는 십오초> 문학과 지성사,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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