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최금진 소년가장

생게사부르 2017. 5. 24. 01:32

최금진


소년가장



밤길을 걸어 집으로 가는데 죽은
아버지 부르는 소리
얘야, 오늘은 마을에 제사가 있구나
목구멍이 빨대 같은 풀들이
피 묻은 꽃들을 혓바닥처럼 밖으로
꺼내어놓을 때
빠드득 빠드득 이빨 갈며 풀벌레가
울고
소년의 굽은 어깨위로 뛰어내리는
나무그림자
귀를 틀어 막아도 따라오는
얘야, 아비랑 가서 실컷 먹고오자
어둠이 허방다리를 놓아주는 늦은
귀갓길에
배 고플까봐, 배곯고 다닐까봐, 소년을
올라타는 소리
아비랑 가자, 아비랑 함께 가자

 

 

     *        *        *

 

 

세상 모든 아버지들은 제대로 눈을 감지 못한다.

소년을 남겨두고 먼저 간 아버지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말하고 싶은데 이승과 저승의 간격은 너무 멀다.

창백한 달이 뜨고, 풀벌레가 살아 보겠다고 이빨을 갈며 우는 밤.

몇 끼를 굶었던 소년의 허기 진 배가 외로움의 부피만큼 울고 있다.

 ‘얘야, 아비랑 가서 실컷 먹고 오자’ 소년의 발에 소리가 고인다.

고여 든 소리가 목덜미를 타고 머리를 감싼다.

소년이 휙, 뒤를 돌아본다.

빽빽한 어둠 속에서 달빛이 함부로 내려와 앉아 둥그스름한 빛을 남기고 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인 돌멩이들이 자글자글 밟힌다.

그 길을 한동안 벗어날 수 없는 소년 앞에,

죽은 아비가 풀려나와 등짝을 어루만진다.

얘야, 얘야.  

 

 

카스 '문학의 향기'

 


1970. 충북제천

1997. 강원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 새들의 역사' 창비.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