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 사적 일상

대한민국은 너에게...김선우 발원 (2)

생게사부르 2015. 12. 20. 14:09

대한민국은 너에게 무엇이냐? (2)

 

 

불교에 대해서 잘 모르고 제대로 공부 해 본적도 없습니다. 다만 고저녁한 산사의 분위기가 좋아 간혹 찾아 다녀 본 것이 불교에 대한 경험의 전부입니다.
하지만 책을 읽는 동안 불교에 대해 나름대로 이해해 봤습니다. 하느님이나 예수님은 이미 정해진 인물로 경배와 숭배의 대상일 뿐 삶의 주체인 내 스스로 올라 갈수 있는 자리는 아닙니다. 반면 부처는 깨달은 사람이니 평범하게 태어 난 누구든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는 것, 평생 정진하며 자신을 성장시켜 나가는 인생이 부처의 삶을 닮는 일일 것이라는 점입니다.

다음과 같은 작가의 말을 보면 나의 해석과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생명, 일체의 중생 모두가 화신불로 이 세상에 왔음을 ... 모든 생명은 본래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으므로 누구나 힘써 노력해서 부처의 삶을 살면 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미 부처로 운명 지어진 신성한 신으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는 질문과 혹독한 수행을 통해 인간의 역사 속에서 가장 먼저 부처의 성품을 깨우치고 스스로 부처가 되신 분’으로 요약되고 있습니다.

원효대사와 의상이 당나라로 가기위해 당항성을 찾던 중 해골바가지 물을 마시고 원효가 깨달음을 얻어 당나라 갈 필요가 없어졌다는 일화는 원효사상을 알 수 있는 간접적인 경험이 되었습니다. 결국 똑 같은 물을 마시고 ‘갈증을 풀고 시원하다’고 느낄 수도 있고 ‘ 구역질’을 할 수도 있다는 건, 달라진 것이 물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인 것이며 결국 ‘진리는 밖이 아닌 내 안에 있다’는 것이겠지요. 깨우침의 상태는 해골바가지에 든 시신 썩은 물이라는 걸 알고도 평상시의 물처럼 역겨움 없이 시원하게 마실 수 있다면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 다스릴 수 있는 상태가 된 경우 - ‘해탈’이라고 감히 해석해 봅니다.
물론 아는 것과 실천을 통해 경험해 내는 것 사이에는 무한급간의 차이가 있지만 먼저 알기라도 해야 실천 할 수 있는 동기가 생겨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적을 탄압하고 사실을 조작하며 민심을 호도하는 권력의 화신들과 그 수하들,
그들의 ‘명령에 회의 없이 복종하는 아무런 생각 없는 살인귀의 텅빈 얼굴들’은 지금 이 세상에서도 무수합니다.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판단치 못한 채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행해지는 숱한 폭력 앞에서 “인간에 대한 자비와 사랑, 화합”을 역설적으로 실천 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이제 죄 없이 죽어간 저 소녀의 가슴위에서 자고 깰 것이다.’ 거기가 내 감옥이 될 것이며 해탈문이 될 것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수많은 ‘단이’들의 억울한 주검들이 난무합니다.
IS에 의해 참수되거나 화형 된 죄 없는 숱한 인질들, 아직 판단력이 여물지 못하여 IS에 자기발로 걸어 들어가 자신의 소중한 몸에 폭탄을 두르는 젊은이들, 지옥을 탈출 해 나오다 죽는 숱한 난민들, 파리를 비롯한 세계 곳곳의 테러 희생자들

‘전쟁은 인간 성품의 한 부분인가? 인간은 전쟁의 목력을 본능을 가진 존재인가?
‘무기를 녹여 쟁기와 보습을 만드는 세상은 불가능 한 것인가? 전쟁을 할 시간과 공력으로 농사에 힘을 쏟아 더 많은 곡식을 생산해 평등하게 나누어 먹으며 행복하게 살 수는 없는 것인가?’ 작가의 의문이 곧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 싶은 이 세상 많은 사람의 의문임을 뼈아프게 절감케 합니다.

‘수행자들이여, 나는 비록 떠나지만 진리의 가르침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열반에 드는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의 공덕을 잘 지키면 문제가 많은 세상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 갈수 있는 해법이 될 수 있을까?
‘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살려라’
‘ 병들어 고통 받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을 보살펴 살리고 편안하게 해 주어라’
‘ 가난하고 의로운 사람을 돕고 위로 하라’
‘ 부처님 법에 따라 청정하게 수행하는 수행자를 잘 외호 하라’

‘세상을 바꾸고 싶은게냐? 너를 바꾸고 싶은게냐’

원효대사 역시 혁명가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성공한 혁명을 통해서 자신이 권력을 잡게 되는 여느 혁명가의 길을 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혁명 과정의 경험만을 안고 획득한 기득권 다 내려놓고 변화된 세상에서 평범한 스님 ‘소성거사‘로 살아간다는 점이 인물의 그릇 크기를 짐작케 합니다.

양 극단을 지양하고 화해를 도모하며 변화해 나갈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인지 ‘변화는 달리는 자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유하는 자와 함께여야 한다.’는 말에 격하게 공감합니다. 오늘 날 대한민국의 많은 문제는 앞만 보면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몰입 해 오면서 잃어버린 사람다움, 인간다움을 회복 할 사유의 철학을 정립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혼돈의 시대 이 혼란한 세상에서 어느 길이 옳은 길인가?
‘길을 만들 수 있다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으면 길이 나타나는 것 아닐런지요.
길이란 게 어차피 본래부터 있던 건 아니니까요’
길을 잃으면 어떻게 될지 알아보기 위해 일부러 길을 잃어 봤다던 어린시절 원효의 당돌함
혼돈스런 세상이지만 이 세상의 숱한 위기 때 마다 저마다의 화엄들이 머리를 맞대 이루어 왔던 역사의 길, 또 새로운 길이 만들어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광화문 광장에 모여 행진하면서 소통하기를 원하는 사람들, 막아서는 사람들이 다 대한민국, 이 땅의 주인들입니다. 기독교와 이슬람으로 대치되고 있는 또 다른 종교전쟁에서도 불교의 화쟁사상이 해법이 되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물, 불, 흙, 바람의 모든 물질적 파동이 간절한 기도와 맞물려 피워내는 꽃들의 홍수-화엄, 죽어가던 원효를 살려 내었던 것처럼 뼈 살리고, 살 살리고, 피 살리고, 숨 살려서 대립과 갈등의 세계를 화해와 회통의 세상으로 바꾸어 원효가 이루고자 했던 ‘아미타림’ 세상을 만드는데 방향을 제시해 주면 좋겠습니다.

역사는 종종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얘기됩니다. 이미 어쩔 수도 없이 지나간 과거지만 현재를 이루는 원천이고 미래를 가져올 바탕이 되기에 과거의 역사에서 현재적인 의미를 되짚어 내곤 합니다. 또한 역사적 사실에서 그 경험을 통해 뭔가를 깨닫고 배우곤 하지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고 단재 신채호선생님의 말을 인용 해 봅니다.

‘너에게 대한민국은 무엇이냐?’

여(與)도 아니고 야(野)도 아닙니다. 유한한 정권은 더구나 아닙니다. 신문과 방송을 장악하여 듣기 좋고 유식해 보이는 미사여구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지식인들의 말과 입만도 아닙니다. 그들이 앞면에 내 세우는 말과 글은 그럴 듯해 보이지만 숨은 이면을 들여다보면 당장 자기 눈앞의 이익을 합리화하고 정당화 시키는 일에 목숨을 걸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배운 사람들이 배운 만큼 사회적 역할을 해 내지 못할 때 사회의 혼란은 가중됩니다.

오천년 내려 온 이 산하,
별로 잘 난 것 없지만 머리보다는 근육을 쓰면서 가슴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이웃과 교류하며 열심히 자기 삶을 살아 온 이 땅의 민초들이 더 존경스러운 이유입니다.

이 산하에서 이제 흙이 되셨을 조부모님, 부모님이 태어나고 살다가 가신 나라, 내가 살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 갈 나라 , 내 자식들이 살아가고 있고 손자들이 앞으로 살아 갈 나라입니다. 이 땅에서 숨 쉬고 살아오신 부모님을 뿌리로 해서 이 땅에서 익힌 모국어로 생각을 키우고 말하며 살아 온 곳,

작가가 원효를 통해 사랑하고자 한 사람들이 결국 민초들이며 현재 대한민국의 평범한 국민들일 것입니다. 원효가 이루고자 했던 불국토로 가는 과정, “화엄‘ 사상이 실천되는 ‘아미타림’은 1400년 역사를 건너 뛰어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이상입니다.
민주주의 이념, 인간의 존엄 같은 용어의 변화는 있지만 한 인간이 ‘소우주’라는 점.
어떤 명목도 개개 국민을 안전이나 행복을 볼모로 이루어질 정토세상은 없습니다.

‘수천수만 송이 꽃이 저마다 완전하게 하나의 꽃이며 그 속에 연결되는 무한 꽃의 그물, 한 송이자 무량수 꽃의 우주’임을 설법한 화엄경은 혼돈이 난무하는 오는 날 이 시점에 우리의 대립과 갈등을 잠재우고 화합과 소통을 위해 반드시 다시 되새겨 적용해야 할 사상입니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주저 앉고 싶을 때 모든 것을 비우고 자신과 주위를 되돌아 보는 것이 참회이고

잘못된 과거를 반성하고 행복한 미래를 바라는 것이 '발원'이라고 합니다.

 

김 선우 작가 , 아직 사십 중반 일텐데 이처럼 "원효와 요석" 이란 인물을 통해 인간사 살아가야 할 이치를 명쾌하게  소설 한권으로 집약 해 내는 능력에 감사와 존경을 보냅니다. 

앞으로도 끊임 없이 인간적 성장을 꾀해 나갈 것임에 그녀의 정신세계의 변화가 주목되면서 또 다른 작품으로 그 변화들을 펼쳐주기를 기대합니다.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