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너에게 무엇이냐?
평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김선우 작가의 ‘발원’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읽고 싶어 졌습니다.
‘원효는 신라의 고승. 속성은 설(薛)로 설총의 아버지. 불교사상의 종합과 실천에 힘쓴 정토종의 선구자로 불교의 대중화에 공헌하여 우리나라 불고사상 가장 위대한 고승으로 추앙됨. 100여종 240여권의 저서가 알려져 있으나, 현존하는 것은 19부 22권뿐이며 그중 대승기신론소, 기신론별기, 금강삼매경론, 화엄경소 등이 대표적임.’
이 정도의 짤막한 역사적 사실로 장편 소설이 어떻게 쓰여 졌는지 궁금해 졌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요석의 얘기는 빠져 있는 경우도 많은데 원효와 요석의 삶을 당시 신라의 시대상, 사회상에 비추어 어떻게 그려내고 있을까?
아직 오프라인 서점을 고집하고 있는 여고동창네 서점엘 달려갔습니다. 책을 단숨에 읽어 내렸고 책을 덮으면서 가슴을 쓸어 내렸습니다. 원효의 ‘아미타림’은 지금 이 나라, 이 시대에도 여전히 필요한 ‘불국토’임을 확신하게 되었고
지금 이 시점,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입 해 보고 싶어져서 신경써서 정리를 한번 해 봤습니다.
‘반듯한 이마와 짙은 눈썹아래 크고 길쑴한 홑겹 눈매와 진지한 눈망울’ ‘견고함과 섬세함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작가는 열 세살 소년 원효의 외모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고대사에 속하여 역사적으로 막연한 개인을 구체적으로 현실에서 살아 있는 인물로 살려내는 작가의 글 솜씨에 마냥 무장해제 당하면서 빠져듭니다.
자신의 생일이 곧 어머니의 기일이기도 한 기구한 운명 속에서 자신이 화랑이 되기를 바라던 아버지는 늘 고독하고 메마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나마 인간다운 정을 교류한 따뜻한 혈육이자 유년시절 원효를 학문의 길로 이끈 스승인 숙부는 원효에게 이렇게 삶을 화두를 던집니다.
‘신라는 너에게 무엇이냐?’
6두품으로 태어났기에 이미 삶의 틀이 한계 지워진 골품제라는 사회. 능력이 여하하든 아예 사회적 역량을 발휘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울분으로 냉소적인 삶을 살았던 숙부였습니다. 그러했던 숙부가 던져준 고민이었기에 원효로서는 일생에 걸쳐 풀어야 할 숙제이자 삶의 목표가 된 셈입니다.
‘승려로 이름을 얻어 국사가 되어라...귀족의 수족 노릇이 아니라 그들을 인도하고 가르치는 자가 될 수 있다. 지금 세상은 불교와 더불어 꽃피는 중이다. 대륙의 역사를 통해 보건대 앞으로도 수백년 간 신라는 불교와 더불어 흥왕 할 것이고...불교는 이 땅에 사는 백성의 미래와 연결 될 것이다’
‘발원’을 독파하는 동안 오늘날 이 시점에서 ‘대한민국은 너에게 무엇이냐?’로 대치해서 읽었습니다. 삼포세대, 칠포세대라는 이 나라 다수의 젊은 층들이 희망보다는 절망에 더 가까이 있는 것 같았고, 금수저 흙수저, 금자식 동자식 하는 등의 용어의 등장은 지금의 대한민국이 새로운 골품제의 장벽을 만들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신라를 사랑한다면 신라와 싸워야 할 것이다.’
조국인 대한민국을 사랑한다면 ‘헬 조선’이라 불리는 요인들과 싸워 이 땅, 대한민국을 희망의 땅으로 바꿔내야 할 것인데 조국이 처한 부조리와 불합리와 싸우기보다는 능력껏 이민을 택해 선진국으로 가겠다는 젊은이들이 많아지고 있는 현실 앞에서 마음이 아픕니다.
책을 읽는 동안 이 세상에 태어나 ‘이 세상의 삶은 너에게 무엇이며 이 세상의 삶이 어떠 해야 하느냐’ 는 작가의 고민은 곧 나의 삶으로 전이되었습니다.
비행기를 비롯한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세계 구석구석을 이웃처럼 여행 다닐 수 있게 해 주었고 인터넷과 스마트폰은 지금 이 시간 세계 곳곳의 상황들을 실시간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자본과 종교와 국가적 이익을 배경에 깔고 테러와 반테러로 얼룩지고 있는 이 지구상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게 하는 해법은 과연 무엇일까?
책을 읽는 동안 그 희망을 보았습니다.
작가는 이미 1400년 전 신라에서 태어 나 한 일생을 살다 간 원효대사의 삶의 궤적을 통해개인적인 삶이 어떻게 사회적인 삶으로 승화되어야 하는지 일관되게 얘기하고 있고 이 땅의 국민들과 더 나아가 인간다움을 상실한 테러의 잔인한 폭력과 절망 앞에서 불안 해 하는 이 세상에 희망적인 미래를 가져다 줄 수 있는 해법으로 불교의 화쟁사상을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권력을 쥐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딸을 희생시키는 것도 서슴치 않는 김춘추를 비롯하여 야신과 비담으로 상징되는 권력의 화신들은 이제나 저제나 무력과 폭력을 앞 세워 협잡과 조작을 일삼습니다.
권력을 쥐어야 하고 잡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지요. 이 땅, 이 시대 역시 너무나 많은 야신과 비담들로 넘쳐나기에 일면 부처님이 얘기하시는 공존 공생의 장이 들어 설 여지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친일과 친일청산, 자본과 노동,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반대, 젊은층과 노년층의 세대 간 갈등등 현재 대한민국 사회의 갈등과 대립 폭력을 넘어 설수 있는 해법은 요원해 보입니다. 그러나 책을 읽다보면 차근차근 그 해법이 제시됩니다.
‘힘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신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세상에 펼 칠 수 있다. 어떤 힘을 가져야 그것이 참된 힘이 되는 것인가?’
먼저 자신을 깨우치는 일에 전력하여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아름다움”을 갖추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삶을 어느 누구에게도 지배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주체적인 삶. 권력이나 금력, 사회적인 규율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의지로 살아가는 삶.
‘신에 종속되지 마라. 계급과 신분에 종속되지 마라. 모든 존재가 존재자체로서 존엄하다.’
심지어 신으로부터도 스스로를 해방시켜 오롯이 자신이 소우주이자 주체가 되는 삶.
그것이 곧 부처의 삶이며 그런 ‘부처의 삶을 살고자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런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이 많은 나라일수록, 신라는 불국토에 가까워지는 것이며 자신이 진정으로 신라를 사랑 할 수 있는 길’임을 깨닫습니다.
‘깨달음은 좋은 것이고, 그래서 뭣에 쓰게? ’
‘문수법상이 법왕유일법 일체무애인(一切無礙人)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 일체에 걸림이 없이 그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는 화엄경의 진리를 실천하며 살고자 하는 원효대사의 삶
대다수 승려들이 세속의 권위에 안주하는 황룡사에서 장경각의 경전을 통달하고 개혁적인 분황사를 거치고 원효의 길을 방해하는 숱한 고초 끝에도 계속되는 수행의 길, 부개화상을 거쳐 도명, 대안대사를 만나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의”의 지혜는 고통속의 나와 더불어 마땅히 해방시키고자 하는 ‘삼계개고아당안지’의 자비와 함께 짝을 이루어야 완전 해 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매 순간 깨어 찬란하게 세계를 꿰뚫고 날마다 스스로를 변혁하는 삶’
부처의 가르침을 현실로 살아내려면 몸이 느끼는 허기와 밥 냄새가 삶의 기본이 되는 저잣거리가 곧 배움의 장소이자 삶의 스승임도 알게 됩니다.
‘나는 이제 머무르지 않음에 머문다. 그 어디에도 머무름 없이 머문다.’
더불어 부처를 사랑하는 것과 부처가 필요한 사람을 사랑하는 불일불이(不一不二) 화두도 풀게 됩니다.
죽어가는 백제군의 생명을 살린 탓에 그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된 혜공, 병자들의 고름을 빨아 생명을 구하는 혜숙, 요석, 바유, 수파현, 흰새 등이 이루고자 하는 세계는 곧 신라백성이 원하는 이상세계일 것이며 ‘아미타림’으로 불리는 ‘불국토’는 공동체가 함께 이루어야 할 이상사회입니다. ‘이름 없는 한 송이 꽃(중생)에도 무한한 우주의 기운이 깃들었으니 산천초목 천지만물이 통째로 진리임에랴... ’ 세상천지를 불국토로 만들겠다는 의지, 모든 생명들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인생을 바치겠다는 의지. ‘네가 발로 밟는 곳마다 그 땅을 불법으로 어루만져라’ 부처님이 바라시는 세상, 진정한 불국토는 이제나 저제나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행복해지는 세상일 것입니다.
작가는 원효대사를 대의의 삶을 산 것으로만 그리지 않았습니다. 한 여성과 영혼을 나눈 사랑도 합니다. ‘하늘이 한 몸처럼 짝지로 딱 맺어 놓았던’ 원효의 부모처럼 원효와 요석 역시 그러한 인연인가 봅니다. 요석을 ‘자신의 심장’으로 여기는 보현랑과 맺어지지 못하고 ‘혼인 할 수 없는 인연’을 선택하여 원효를 은애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부처의 삶을 이루라 격려합니다.
‘원효랑이 신라의 동량되시는 걸 보고 싶었습니다. 뒤늦게 안 출가 소식에 천지를 잃은 듯 슬펐습니다만 백고좌법회에서 알았습니다. 이것이 님의 길입니다. 부디 이루소서. 도반으로서 저 역시 소임을 궁구하겠나이다.’
분명히 영혼이 닮은 인연이었을 겁니다. 원효가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껴안으며 자신의 운명을 피하지 않았다면 요석 또한 그런 인물의 여성이었겠지요.
그러나 ‘단이’의 무덤이자 하늘의 뜻과 백성들의 뜻이 모이는 곳, ‘하늘우물’(첨성대)을 짓는 과정에서 또 삼국통일의 야망을 달성하고자 하는 위정자들의 전쟁으로부터 백성들을 일깨워내면서 사회변혁의 선두에 서게 된 원효는 김춘추의 계략에 말려듭니다.
영혼으로 얽힌 영원의 사람, 요석의 목숨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소녀가 짐이 되었습니다.’
전쟁을 반대하는 대역 죄인이자 여자를 탐한 파계승의 오명. ‘원효라면 능히 신라를 불국토로 완성 할 수 있으리라’는 김준후 공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승려로서 그간 받아온 백성들의 추앙과 사랑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일순 ‘세상 가장 고독한 자리로 추락 ’해 내려가는 것에 아무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전쟁의 상처가 가득 남겨진 폐허 위를 날고 있는 잠자리 떼의 고요한 비상...여기저기 널브러진 시신위로 잠자리 떼가 사랑을 나누며 날아다니던 풍경...어떤 잔인함 속에서도 기어코 사랑을 나누는 존재가 있다는 듯이, 그것이 목숨가진 존재의 슬픈 운명이자 위엄이라는 듯이, 그것이 삶이라는 듯이...’
결국 작가가 얘기하고 싶었던 부분이 이 단락이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진정 거리낌 없이 깨우친자라면 혁명도 사회적인 대의명분도, 영혼과 영혼이 만난 진정한 사랑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님을... 한 목숨과 한 목숨이 만나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러해야 함을 역설하는 듯 합니다. 그곳서부터 출발한 사랑이 이웃으로 사회로 퍼져나가 화엄을 진정한 불국토를 완성 할 수 있음을 피력합니다.
강신주씨의 해제에서 처럼 이미(다른 이의 자식을)임신 한 몸의 요석을 원효가 자신의 평생의 명예를 벗어 던지고 감쌌다고 해도 좋았고, 실제 요석과 영혼을 교류하는 사랑을 나눴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불가에서는 ‘원효’라는 인물에 ‘파계"라는 세속성이 흠이 된다 생각 했던지 요석과 원효, 원효와 설총의 관계를 불투명하게 얼버무리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원효는 의상이 아니지 않습니까? 모범적인 계율을 지키고 불가의 규범 안에서 고승으로 이름을 남기거나 세속과 동떨어진 산속에서 수행자로 일생을 바친 많은 고승들과 다른 행적을 살았다는 점이 원효의 위대함입니다.
황룡사든 분황사든 불집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저잣거리에서 생활하며 ‘하늘 우물’로 상징되는 통치자와 하늘의 뜻이 백성과 만나는 곳을 지향하는 삶 . 백성들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한숨과 고통과 함께 해야 하는 삶에서 술과 여자, 저잣거리의 걸죽한 욕설마저 정겹게 느껴졌을 원효의 삶입니다.
어려운 범어나 한문으로 된 불경을 읽을 수 없어서 부처님 말씀을 알거나 실천 할 길이 없는 삶이 고단한 백성들에게 그들만의 방식으로 부처님을 알 수 있도록 불교를 전파 하는 일은 원효만이 해 낼 수 있는 업적이었습니다. (2편으로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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