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근
흑백시대
진해의 봄 흑백 다방에 앉아
가버린 시대의 흑백 사진을 생각한다
빛바랜 사진첩의 낡은 음계를 딛고
그 무렵의 바람같이 오는 길손
잠시 멍한 시간의 귀퉁이를 돌다
바람벽 해묵은 아픔으로 걸렸다가
빛과 색채와 음악이 함께 과거가 되는
그런 주술적 공간에 앉았노라면
시대를 헛돌며 온 바람개비
아무것도 떠나 간 것이라곤 없구나
김창근: 1942. 부산
흑백다방
진해 대천 2번지, 섬 하나 떠 있었네
늦 4월 창문 밖에는 꽃시절 한창인데
찾잔을 놓는 그 손가락 희고도 길었네
속눈썹을 길러서 마음을 지운 당신
흑백의 거리는 멀고도 단호해서
단조의 피아노 소리만 침묵을 밟아가고,
또각또각 낮은 음계로 구두가 사라질 때
붉었던 우리 입술 끝도 없이 져 내리고
화병의 검은 속처럼 나는 여태 비어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