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천
등
너와 헤어져야 할 시간이 가까워지면
등이 먼저 신호를 보내오고는 했다
미워져서
얄미워져서
한번은 너를 끙, 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불러보려고
마음 먹기도 해 보았지만
언제나 대나무처럼 짱짱하던 이름을 지녔던
등이여
마침내 돌아서 가는 너의 뒤에서
정면이 되어 바라보이던
단호한 표정의 맨 얼굴이여
2011. 문학동네 <십년만의 사랑>
김병호
저녁의 계보
바꿔 내온 잔에도 금이 있었지만
뒤돌아 서는 여주인의 맨발을 보고는
말을 삼켰다
창마다 고인 저녁 밖에선
계집아이 하나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제 몸에 그믐을 새긴 잔이나
뒤늦게 이혼을 이야기 하는 아버지나
무릎 오그리고 앉아 울고 있는 저 아이나
누구에게나 하나의 이름은
지우지 못한 금이다
금이 간 저녁이
당신을 지나간다
2012. 문학수첩, <밤새 이상李霜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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