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니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그래봤자 결국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오늘부터 나
는 반성하지 않을 테다. 오늘부터 나는 반성을 반성하지 않을 테다.
그러나 너의 수첩은 얇아질 대로 얇아 진 채로 스프링만 튀어오를
태세. 나는 그래요. 쓰지 않고는 반성 할 수 없어요. 반성은 우물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너의 습관. 너는 입을 다문다. 너는 지친다.
지칠 만도 하다.
우리의 잘못은 서로의 이름을 대문자로 착각 한 것일 뿐. 네가 울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 본다면 나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겠다
고 결심한다. 네가 없어지거나 내가 없어지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그러나 너는 등을 보인 채 창문 위에 뜻 모를 글자만 쓴다. 당연히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가느다란 입김이라도 새어 나오는 겨울
이라면 의도한 대로 너는 네 존재의 고독을 타인에게 들킬수도
있었을텐데 대체 언제부터 겨울이란 말이냐. 겨울이 오긴 오는 것
이냐 분통을 터뜨리는 척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리고 중얼 거린다.
너는 등을 보인 채 여전히 어깨를 들썩인다. 창문 위의 글자는
씌어지는 동시에 지워진다. 안녕 잘 가요. 안녕 잘 가요. 나도 그래
요. 우리의 안녕은 이토록 다르거든요. 너는 들썩인다 들썩인다 어
깨를 들썩인다
헤어질 때 더 다정한 쪽이 덜 사랑한 사람이다. 그 사실을 잘 알
기에 나는 더 다정한 척을, 척을 척을 했다. 더 다정한 척을 세번도
넘게했다. 안녕 잘가요. 안녕 잘가요. 그 이상은 말 할수 없는 말
들일 뿐. 그래봤자 결국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1972. 부산
2008. 경향신문 신춘문에 시' 페루' 당선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 왜냐하면 아마도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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