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기형도 나리나리 개나리, 빈집

생게사부르 2017. 3. 2. 01:03

기형도


나리 나리 개나리



누이여
또 다시 은비늘더미를 일으켜 세우며
시간이 빠르게 이동하였다
어느 날의 잔잔한 어둠이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한 너의 생애를
소리 없이 꺾어갔던 그 투명한
기억을 향하여 봄이왔다
살아 있는 나는 세월을 모른다
네가 가져간 시간과 버리고 간 시간
시간들의 얽힌 영토 속에서
한 뼘의 폭풍도 없이 나는 고요했다
다만 햇덩이 이글거리는 벌판을
맨발로 산보할 때
어김없이 시간은 솟구치며 떨어져
이슬 턴 풀잎새로 엉겅퀴 바늘을
살라주었다
봄은 살아 있지 않은것은 묻지 않는다
떠 다니는 내 기억의 얼음장마다
부르지 않아도 뜨거운 안개가 쌓일 뿐이다
잠글수 없는 것이 어디 시간 뿐이랴
아아,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을 거느리는가

나리 나리 개나리

네가 두드릴 곳 하나 없는 거리
봄은 또 다시 접혔던 꽃술을 펴고

찬물로 눈울 헹구며

유령처럼 나는 꽃을 꺾는다

 

 

 

빈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1960-1989. 인천 옹진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문학과 지성사.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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