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신철규 샌드위치맨

생게사부르 2017. 1. 31. 16:50

신철규


샌드위치맨


그는 무심과 무관심 사이에 있다
그는 좀 더 투명해져야만 한다

그는 처음에 모자와 마스크로 변장을 했지만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변장이란 것을 깨닫는다
그는 아침마다 거울을 보고 입술을 지운다

그는 앞뒤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는 말과 말 사이에 갇혀 걷는다
말의 고삐에 꿰여 말의 채찍질을 받으며

그는 납작해진다
그는 양면이 인쇄된 종이가 된다
사람들이 그를 밟고 간다
그의 온몸은 발자국 투성이다

어제는 피켓을 든 한무리의 시위대와 함께 걸었다
그는 목소리가 없어 추방당했다

그는 앞뒤로 걸친 간판을 벗고
그늘에 앉는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낀 그늘
그림자와 그림자가 겹쳐 더욱 짙어지는 그늘

사람들은 그가 그렇게 두툼 한 줄 그제야 알아본다 


                                   - 문장웹진 2013. 8월

 

 

1980. 경남 거창 출생

      2011.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샌드위치맨이라는 말이 있다. 제 몸의 앞뒤로 광고판을 붙이고 대도시를 돌아다니면서 특정 상품이나 업소를 알리는,

걸어다니는 광고판을 가리키는 말이다. 역사는 오래되었다. 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을 정도다.

1864년께 영국의 식료품 제조·판매회사인 립턴의 창립자인 T J 립턴이 홍차 판매를 시작하면서 남의 눈에 잘 보일 수

있도록 인도인 복장을 한 샌드위치맨을 고용한 것이 그 시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미 대항해시대 이후에 유럽의 항구도시마다 오늘날의 샌드위치맨과 유사한 형태가 있었다고도 한다.

이제 막 인도나 브라질에서 도착한 상선에 어떤 상품이 실려 있는지를 알리기 위해 선원들이 앞뒤로

큼직한 상품목록이 쓰여진 옷을 입고 항구도시를 돌아다녔다고 한다.

오래된 자료사진들은 6·25 한국전쟁 이후 부산의 국제시장 같은 곳에서 샌드위치맨이 남루한 차림으로

가게를 선전하거나 구직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생존위기에 내몰린 청춘들의 고행 

 

 

오늘날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도 여러 형태의 샌드위치맨을 쉽게 볼 수 있다.

휴대폰 가게가 밀집해 있는 일산의 대형 쇼핑몰 앞에는 각 점포에서 고용한 젊은이들이 키다리 아저씨나

어릿광대 분장을 하고 걸어다닌다.

여자 알바생들은 일본 만화에서 봄직한 차림으로 돌아다니면서 행인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준다.

주말이면 사람들이 서로의 등을 떠밀면서 걸어야 할 정도로 북새통이 되는데, 그 많은 행인들에게

젊은 알바생은 하루 종일 광고용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어 갖가지 형상을 만들어 나눠준다. 

고된 노동이다. 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멍울이 지는 노동이다. ‘알바’라고 말할 수 없는,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할 수 없는,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할 수 없는, 마음속에 상처가 남는 감정노동이다.

항상 웃어야 하고 행복한 듯 뛰어다녀야 한다.

수많은 대중에게 자신을 노출시킨 채 고된 감정노동에 시달려야 한다. 

다른 나라에서도 이 같은 노동을 찾아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여성의 허벅지에 홍보 스티커를 붙이고 하루 8시간 이상 걸어다니게 한 적도 있고,

영국에서는 노숙인을 무선 인터넷 중계기로 이용하는 ‘인간 와이파이 서비스’를 선보인 적도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이런 행위가 도시 미관의 측면에서도 그렇고 무엇보다 비인간적인 노동이라는 측면에서

규제를 하기도 했다.

2008년 브라질 상파울루시는 도시미화법에 따라 샌드위치맨 광고를 금지했다.

스페인 마드리드 자치정부도 2008년 10월, 인간의 신체를 광고판으로 사용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심각하게 훼손한다”며 전면 금지했다.

그러나 양 측면에서 이런 조치는 흐지부지되었다. 우선 광고회사들이 반발했다.

다양하고 기발한 광고전략에 어긋난다는 이유다.

무엇보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들로서는 이 같은 노동마저도 귀한 일자리가 된다.

마드리드 자치정부는 두 달 만에 포기했다. 

이러한 노동에 대한 최소한의 인권적 검토도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오래 전부터 인간의 신체를 이용한

길거리 홍보가 벌어져 왔다. 경남 김해에서 진영으로 가는 대로변에는 가구단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그 수많은 가구점 앞에서 아가씨들이 하루 종일 춤을 추고 서 있었다.

경기도 김포시 풍무지구의 아파트 분양 현장에서는 20명의 여성들이 요란한 복장을 하고 춤을 췄다.

돈암동의 빵가게, 신촌의 휴대폰 가게, 영등포 주점 앞에서도 어김없이 춤을 춘다.
 
< 비정성시>로 유명한 대만의 영화감독 허우샤오시엔은 1983년에 <샌드위치맨>이라는 단편을 만들었다.

영화 속에서 어릿광대 분장을 한 주인공은 영화 포스터가 그려진 나무판을 목에 걸고 다닌다.

마음이 불편하고 심장이 울컥거리는 장면들이다. 이제 그런 비애를 우리의 대도시에서 매일같이 보고 있다.

복장은 요란하되 슬픈 풍경이요, 춤사위는 섹시하지만 그 신체는 애틋하여 차마 보기도 안쓰럽다. 

정윤수 <문화평론가>


원문보기: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5&artid=201309101903591#csidx3fafacc55ef25c58655a4b3e3afabb3

 

 

      대만영화: 샌드위치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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