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20년후에 , 지芝에게

생게사부르 2017. 1. 15. 15:16

최승자


20년 후에, 지(芝)에게 


 

지금 네 눈빛이 닿으면 유리창은 숨을 쉰다.
지금 네가 그린 파란 물고기는 하늘 물속에서 뛰놀고
풀밭에선 네 작은 종아리가 바람에 날아다니고,
이상하지,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빈 벌판에서 차갑고도 따스한 비를 맞고 있는 것 같지.
눈만 뜨면 신기로운 것들이
네 눈의 수정체 속으로 헤엄쳐 들어오고
때로 너는 두 팔 벌려, 환한 빗물을 받으며 미소 짓고······
이윽고 어느 날 너는 새로운 눈(眼)을 달고
세상으로 출근하리라.
많은 사람들을 너는 만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네 눈물의 외줄기 길을 타고 떠나가리라.
강물은 흘러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너는 네 스스로 강을 이뤄 흘러가야만 한다.
그러나 나의 몫은 이제 깊이깊이 가라앉는 일. 봐라,
저 많은 세월의 개떼들이 나를 향해 몰려오잖니,
흰 이빨과 흰 꼬리를 치켜들고
푸른 파도를 타고 달려오잖니.
물려 죽지 않기 위해, 하지만 끝내 물려 죽으면서,
나는 깊이깊이 추락해야 해.
발바닥부터 서서히 꺼져 들어가며, 참으로
연극적으로 죽어가는 게 실은 나의 사랑인 까닭에.
그리하여 21세기의 어느 하오,
거리에 비 내리듯
내 무덤에 술 내리고
나는 알지
어느 알지 못할 꿈의 어귀에서
잠시 울고 서 있을 네 모습을,
이윽고 네가 찾아 헤맬 모든 길들을,
- 가다가 아름답고 슬픈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의 동냥바가지에 너의 소중한 은화 한 닢도
기쁘게 던져 주며
마침내 네가 이르게 될 모든 끝의
시작을!

 

* <즐거운 일기>(문학과지성사, 1984) 수록

 

 


 

*     *     *

 

 

 - 이상하지 살아 있다는 건, 참으로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 목숨밖에 팔 게 없는 세상,

- 목숨은 처음부터 오물이었다.

 

 

정신분열증 11년만에 시집을 낸 시인 최승자

 

시인 최승자의 음성에서 쇳소리가 났다.

살가죽이 거의 붙은 얼굴과 그 속의 쑥 파인 눈

마른 막대기 같은 몸피를 숫자로 환산하면 키 149cm 몸무게 34kg이다. 그녀는 가족이 없었다.

서울의 세 평짜리 고시원과 여관방에서 밥 대신 소주로, 정신분열증으로 보낸 불면의 시간

죽음의 직전 단계까지 간 그녀를 찾아내 포항으로 데려온 이가 외삼촌이다.

 

밥 안 먹지만 취미는 요리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아

난 기초생활수급 대상자

흘러가지 않는 저 세월은

내게 똥이나 먹이면서

나를 무자비하게 살려둬

 

 

      1952년 충남 연기

수도여고와 고려대 독문과

 

계간 『문학과지성』 1979년 가을호에 「이 시대의 사랑」으로 등단

시집, 『이 시대의 사랑』 『즐거운 일기』 『기억의 집』 『내 무덤 푸르고』

시선집, 『주변인의 초상』 등.

그 밖에 번역 시집 『죽음의 엘레지』역서,『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호』 『자살 연구』

 

 

 

너에게

 

 

네가 왔으면 좋겠다.

나는 치명적이다.

내게 더 이상 팔 게 없다.

내 목숨밖에는.

 

목숨밖에 팔 게 없는 세상,

황량한 쇼윈도 같은 창 너머로

비 오고, 바람 불고, 눈 내리고,

나는 치명적이다.

내게, 또 세상에게,

더 이상 팔 게 없다.

내 영혼의 집 쇼윈도는

텅텅 비어 있다.

텅텅 비어,

박제된 내 모가지 하나만

죽은 왕의 초상처럼 걸려 있다.

 

네가 왔으면 좋겠다.

나는 치명적이라고 한다.

 

 

 

 

마음의 뒷쪽에선 비가 내리고

그 앞에는 반짝반짝 웃는 나의 얼굴

에나멜처럼 반짝이는

저 단단한 슬픔의 이빨.

어머니 북이나 쳤으면요

내 마음의 얇은 함석 지붕을 두드리는

산란한 빗줄기보다 더 세게 더 크게,

내가 밥빌어 먹고 사는 사무실의

낮은 회색 지붕이 뚫어져라 뚫어져라.

그래서 햇살이 칼날처럼

이 회색의 급소를 찌르도록

어머니 북이나 실컷 쳐 봤으면요.

 

 

여성에 관하여

 

 

여자들은 저마다의 몸 속에 하나씩의 무덤을 갖고 있다.

죽음과 탄생이 땀흘리는 곳,

어디로인지 떠나기 위하여 모든 인간들이 몸부림치는

영원히 눈먼 항구.

알타미라 동굴처럼 거대한 사원의 폐허처럼

굳어진 죽은 바다처럼 여자들은 누워 있다.

새들의 고향은 거기.

모래바람 부는 여자들의 내부엔

새들이 최초의 알을 까고 나온 탄생의 껍질과

죽음의 잔해가 탄피처럼 가득 쌓여 있다.

모든 것들이 태어나고 또 죽기 위해선

그 폐허의 사원과 굳어진 죽은 바다를 거쳐야만 한다.

 

 

기억하는가

 

 

기억하는가

우리가 만났던 그날

환희처럼 슬픔처럼

오래 큰물 내리던 그날

 

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 뒤척였다.

 

 

너에게

 

 

마음은 바람보다 쉽게 흐른다.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지다가

어느새 나는 네 심장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죽지 않는 태풍의 눈이 되고 싶다.

 

 

 

돌아와 이제

 

 

새들은 항상 낮게 낮게 가라앉고

산발한 그리움은 밖에서,

밖에서만 날 부르고

 

쉬임 없는 파문과 파문 사이에서

나는 너무 오랫동안 춤추었다.

 

이젠 너를 떠나야 하리.

 

어화 어화 우리 슬픔

여기까지 노저어 왔었나.

 

내 너를 큰물 가운데 두고

이제 차마 떠나야 하리.

 

오래 전에 내 눈 속 깊이 가라앉았던 별,

다시 떠오르는 별.

오래 갈구해 온 나의 땅에

다시 피가 돌고

돌아와 이제 내 울타리를 고치느니,

 

허술함이여 허술함이여

버려진 잡초들이

이미 내 키를 넘었구나

 

 

 

비극

 

 

 

죽고 싶음의 절정에서

죽지 못한다, 혹은

죽지 않는다.

드라마가 되지 않고

비극이 되지 않고

클라이막스가 되지 않는다.

되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견뎌내야 할 비극이다.

시시하고 미미하고 지지하고 데데한 비극이다.

하지만 어쨌든 이 물을 건너갈 수 밖에 없다.

맞은편에서 병신 같은 죽음이 날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바람의 편지

 

 

내 너 두고 온지

벌써 한 달

바람의 편지도

이제 그쳤구나

 

아 내 기억 속에서

푸르른 푸르른

또 다시 하루 가고 이틀 가도

내 기억 속에서

푸르고 푸르를

언제나 새로이 쓰여 질

 

아 지리산, 바람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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