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김혜순 피어라 돼지

생게사부르 2017. 1. 10. 17:15

김혜순


피어라 돼지



훔치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죽이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재판도 없이
매질도 없이
구덩이로 파묻혀 들어가야 한다

검은 포크레인이 들이 닥치고
죽여! 죽여! 할 새도 없이
알전구에 똥칠한 벽에 피 튀길 새도 없이
배 속에서 나오자마자 가죽이 벗겨져 알록달록 싸구려 구두가 될 새도 없이
새파란 얼굴에 검은 안경을 쓴 취조관이 불어! 불어! 할 새도 없이
옆방에서 들려오는 친구의 뺨에 내리치는 손바닥을 깨무는 듯
내 입안의 살을 물어 뜯을 새도 없이
손발을 묶고 고개를 젖혀 물을 먹일 새도 없이
엄마 용서하세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할새도 없이
얼굴에 수건을 놓고 주전자 물을 부을 새도 없이
포승줄도 수갑도 없이

나는 밤마다 우리나라 고문의 역사를 읽다가
아침이면 창문을 열고 저 산아래 지붕들에 대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이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나에겐 노래로 씻고 가야 할 돼지가 있다
노래여 오늘 하루 12시간만 이 몸에 붙어 있어다오

시퍼런 장정처럼 튼튼한 돼지 떼가 구덩이 속으로 던져진다

무덤 속에서 운다
네 발도 아니고 두 발로 서서 운다
머리에 흙을 쓰고 운다
내가 못 견디는 건 아픈게 아니에요!
부끄러운 거에요!
무덤 속에서 복부에 육수 찬다 가스도 찬다
무덤 속에서 배가 터진다
무덤 속에서 추한 찌개처럼 끓는다
핏물이 무덤 밖으로 흐른다

비오는 밤 비린 돼지 도깨비불이 번쩍뻔쩍한다

터진 창자가 무덤을 뚫고 봉분 위로 솟구친다

부활이다! 창자는 살아 있다! 뱀처럼 살아 있다!

 

피어라 돼지!

날아라 돼지!

 

멧돼지가 와서 뜯어 먹는다

독수리떼가 와서 뜯어 먹는다

 

파란 하늘에서 내장들이 흘러 내리는 밤!

머리 잘린 돼지들이 번개치는 밤!

죽어도 죽어도 돼지가 버려지지 않는 무서운 밤!

천지에 돼지 울음소리 가득한 밤!

 

내가 돼지! 돼지! 울부짖는 밤!

 

돼지 나무에 돼지들이 주렁주렁 열리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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