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나와 나타샤와 힌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힌(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힌(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힌 당나귀>여성 3권 3호,1938.3
여승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냄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平安道)의 어늬 산(山)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女人)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女人)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山)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 절의 마당귀에 여인(女人)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 * *
'남에 정지용, 북에 백석' 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우리현대사의 비극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는 시인의 삶, 그가 남긴 주옥 같은 시들에도 불구하고
저의 대학시절은 물론 교사생활을 시작하고나서 한참까지도 그의 이름과 그의 시들은 ' 금기'였습니다.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매몰되었다가 1980년대 후반부터 발굴되기 시작한 '보석같은 시인'이라는
표현에 동의합니다.
'김수영' '윤동주' 시인의 시로 블로거를 시작하면서 참으로 아껴 두었던 시인이라 해야 하나요?
겨울에 어울리는 시인이라 그랬는지 결국 겨울까지 왔습니다.
이전 매우 바쁜 생활인이었을 때 하루가 사흘처럼 느껴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오전 학교근무를 하고, 오후에 출장을 가서 다른 공간에서 다른 주제로 오후를 보내고
퇴근 이후 부모님 기제를 지내러 가서 자정이 너머 집에 돌아오는 일 같은 경우처럼...
백석시인은 세 사람의 인생을 살았던 것 같은 풍성함을 지닌 시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분단되기 전 남한에서 남긴 주옥같은 110편의 시와 삶.
분단 이후 북한에서의 생활과 활동
양쪽을 아우르는 통합된 삶과 작품세계를 평가해야 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백석 연구에 남다른 열정을 지녔던 비평가 송준선생의 평을 가져와 봅니다.
<이 땅에서 가장 순수한 서정시인이며 사상성을 시에 훌륭하게 간직했던 시인으로
현학적이며 외래적인 시풍을 과감히 배격하여 관념적이고 공허한 동시대의 시들을 부끄럽게 하였다.
백석은 릴케보다도 더 감수성이 예민하고, 서민적이고, 솔직한 시를 썼다.
푸시킨보다도 더 쉽고 아름다운 시를 썼고 도연명보다도 더욱 진실하게 자연을 사랑하는 훌륭한 시를 썼다.
백석은 이태백의 현학적이고 화려함을 현실적으로도 능가한다.
그리고 백석은 이 모든 유명 시인들의 정치성을 배격하고, 외국의 들뜬 싸구려 감정의 낭만적인 시들을 거부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당대의 입방아만 찧던 싸구려 외국 시들을 부끄럽게 하는 유일한 시인이다.> _송준_ (문화평론가)
백석 시인의 삶 자체가 바로 우리 민족분단의 비극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서 특별하고
토속적이면서 가장 한국적인 서정시를 많이 썼고, 민족성을 함뿍 담은 전통 언어를 질박하게 구사한
서정시인답게 애틋한 연인들의 얘기가 소설이나 영화의 주인공보다 더 생생하게 남아 있어서 또 그러합니다.
당대 모던(modern)보이에 잘 생긴 외모, 패션까지 멋져서 그 당시 마치 외국인 같았다는(김영한 표현)
분위기에 영어를 전공하고 시를 쓰는 지성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두었던 두 여성과의 사랑은
현실로 이루어지지 못 했다고 알고 있는데 진실은? 잘 모르겠습니다. 시인은 꼭 현실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상상력을 발휘 할 수 있기도 하고, 진실과 상관 없이 후세에 의해 미화되거나 해석하기 나름 일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일단 시를 가지고 해석한 내용으로는 몇번이나 찾아갔던 통영의 '란'이는 큐피드 화살이 잘못 갔는지 중간에서
맺어주려고 했던 지인 '신현중'과 결혼을 해 버렸다고 합니다. '란'이로 불린 여성이 백혈병으로 죽었다는 얘기도
있고 신현중씨 통영서 교장을 했다는 얘기가 있는 걸 보면 '란' 이란 여성 교사사모님으로 사시다가,
교장샘 사모님으로 사셨는 듯 합니다.
' 김진세의 누이'라는 분도 고만한 남자분에게 시집을 갔을지...
결국 '자야(子夜)라는 애칭의 김영한씨 마음에 평생 담겼던 셈인데 그 분에 의해
백석 문집이 발간되고 기념사업이 이루어진 셈이니 ...그래도 행운아 였다고 해야 할까요?
물론 부인들은 따로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세번 결혼 후 북에 계시는 동안
네번째 부인(리윤희)과 끝까지 사시고 가족 사진도 남기셨네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시에 나오는 여성이 누굴지...시인 본인이 가장 잘 아시겠지만 본인이 살아 생전
' 누구'라고 밝히지 않은 이상 ' 란'이든 '자야'든 ' 최정희'든 개인적으로 진실은 별 상관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시가 나올 당시 ' 교제했고 함께 만주로 가자'고 했다니 정황으로 봐서 김영한 여사가 본인을 두고 지은
시라고 믿고 돌아가셨으면 그걸로 된것 같아요.
역사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한, 남여간 사랑에서 ' 상대에게 있어 자신이 최고의 여자' 였다는 믿음이
중요한 것 아닐까요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자연과 우주의 이치도 본인을 중심으로 돌아가겠지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사랑'과' 평화'를 얻고 살아 봤다면 그 삶은 성공한 인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에게 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그러고 싶은 요즘입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안 보고 안 듣고 살고 싶기도 합니다만...
<1980년대 중반 북에서 찍은 가족 사진>
이 시절에는 이전의 혼인 풍습이 남아 있어 양가 부모님들이 어릴 때 부터 정혼을 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젊은 아버지들이 친구랑 술 한잔 드시고 기분이 좋으면 '나중에 자네 딸하고 우리아들하고
맺어 줌세' 하는 것이죠. 그래서 자녀들은 생판 상대방의 얼굴도 모르는 채 부모님들 결정에 따라
혼인을 해야 하는 경우들이 흔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의반 타의반 남성들이 일찍 혼인을 하여 시골에 부인이 있는 경우가 많았지요.
그러나 조상 대대로 살아 온 곳에서 갑돌이 갑순이로 고만고만하게 농사나 짓고 살면 모르지만
해외 유학을 가고 신학문을 접하고 배움이 높아지면 함께 어울리던 신여성들과 연애를 하게 됩니다.
이 시기 그런 연애 때문에 불행해진 인물들이 많았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이 '사의 찬미'로 유명한
윤심덕과 김우진이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졌다고 알려진 경우일 것입니다.
백석 시인 역시 부모님들의 그런 요구를 물리치지 못하여 혼인을 했다가 도망을 나온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이미 그렇게 이루어진 일들, 지난 역사에 '~ IF(가정)을 해 보는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만
젊은 시절 마음에 두었던 이성과 결혼을 하고 따뜻한 남쪽 통영과 인연을 가지게 되어
혹 남한에 남게 되셨더라면? 시 쓰시는 영어과 대학교수가 되셨을지요.
북한의 협동농장 노동자로 사셨던 노년의 사진에서 보이는 표정도 담담하고 편안해 보이십니다만
남한에 계셨더라면 이후 어떤 삶의 궤적을 남기시고 또 그에 일치된 진솔한 시를 보여 주셨을지
혹시 남북이 분단이 되지 않았더라면 '노벨상' 후보감이 되셨을지 참으로 아쉽고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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