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김혜순 하나님의 십자수와 레이스에 대한 강박,1

생게사부르 2016. 12. 24. 12:02

김혜순


하나님의 십자수와 레이스에 대한 강박,1


하나님의 십자수와 레이스에 대한 강박은
해가뜨고 달이뜨는 오래된 패턴북을 넘겨보면 알
수 있죠

가만히 안개 내리는 강가에 서 있어도 저절로 알게
되죠

그 가늘고 투명한 실을 처음 손가락에 걸 때는
이토록 가벼워서 어쩌나 움찔하지만
긴 이야기 묘연한 레이스가 시작되는 거죠
레이스는 자라서 피 묻은 속옷이 될까요?

강물에 떠내려가는 면사포가 될까요?

땅속에서 착용하는 복장이 될까요?

 

아 정말 신기한 무늬야 했지만

낡은 패턴북을 넘겨보면

엄마의 결혼 첫날밤 커튼처럼

그 무늬 속에 다 들어 있는 이야기

 

구멍 숭숭 뚫린 투명한 무늬들 속에

1월 1일 12월 18일 12월 25일

 

하나님은 십자수와 레이스의 강박증 환자

커튼처럼 창틀에 걸터앉아 안팎의 비밀을 다엿듣

고는 펄럭펄럭하기만 하죠

 

나의 신경망이 엉킨 낚싯줄처럼 뭉쳐져선

난파선같이 출렁이는 바닥에 팽개쳐지는 날

 

빗금 빗금 빗금

물결 물결 물결

 

긁 긁 긁

금 금 금

 

크랙 크랙 크랙

스크래치 스크래치

 

하나님의 십자수와 레이스에 대한 강박은

산 채로 돼지 2천 5백 마리 파묻은 우리 큰집 앞 산

자락을

흰 눈으로 몽땅 덮어놓은 걸 보면 금방 알수 있죠

 

웅크리고 누운 죽음의 애벌레 속에서

희디흰 실을 물고 나비들 뿜어 나오듯

 

낡은 패턴북을 뚫고 점점이 날아오는 속눈썹과

속눈썹의 입맞춤 같은 흰 눈송이들

 

벌판 가득 가벼운 무늬가 눈 감고 숨숨숨 내려오죠

소녀의 미소 같은 구멍들을 내뿜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