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김광균-와사등, 외인촌

생게사부르 2015. 12. 9. 21:46

김광균

 

               <와사등(瓦斯燈)>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여름 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高層), 창백한 묘석(墓石)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夜景), 무성한 잡초(雜草)인 양 헝클어진 채

사념(思念)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皮膚)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구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悲哀)를 지니고 왔기에

길--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信號)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조선 일보≫ (1938. 6.)


외인촌 外人村


하이얀 모색(暮色) 속에 피어 있는
산협촌(山峽村)의 고독한 그림 속으로
파아란 역등(驛燈)을 단 마차가 한 대 잠기어 가고
바다를 향한 산마루 길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 위엔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바람에 불리우는 작은 집들이 창을 내리고
갈대밭에 묻힌 돌다리 아래선
작은 시내가 물방울을 굴리고,

안개 자욱한 화원지(花園地)의 벤치 위엔
한낮에 소녀들이 남기고 간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 있었다.

외인 묘지(外人墓地)의 어두운 수풀 뒤엔
밤새도록 가느단 별빛이 내리고,

공백(空白)한 하늘에 걸려 있는 촌락(村落)의 시계(時計)가
여윈 손길을 저어 열 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고탑(古塔)같이 언덕 위에 솟아 있는
퇴색(褪色)한 성교당(聖敎堂)의 지붕 위에선

분수(噴水)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