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규
묘비명(墓碑銘)
한 줄의 시(詩)는 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詩人)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가난한 시인/ 이생진
가난한 시인이 펴낸 시집을
가난한 시인이 사서 읽는다
가난은 영광도 자존도 아니건만
흠모도 희망도 아니건만
가난을 시인의 훈장처럼 달아주고
참아 가라고 달랜다
저희는 가난에 총질하면서도
가난해야 시를 쓰는 것처럼
슬픈 방법으로 위로한다
아무소리 않고 참는 입에선
시만 나온다
가난을 이야기 할 사이 없이
시간이 아까워서 시만 읽는다
* 감상: 이근배 시인
시는 가난속에서만 나온다? 딱히 그럴 까닭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왠지 옛날부터 육신의 양식만큼이나 값진 영혼의 양식인
시를 씨뿌리고 거두는 시인의 곳간은 비어 있어야 제격인것처럼,
가난이 시인에게 주는 훈장인 것처럼 됐다.
그래도 시인이 늘어 나는 것을 보면 가난 속에도
남 모르는 금덩이를 쥐고 있는 것인지?
이렇게 시 읽기의 행복에 가난을 잊을수도 있다니
오직 고마울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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