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스며드네 / 허수경
잎들은 와르르 빛 아래 저녁 빛 아래 물방울은 동그르 꽃 밑에
꽃 연한 살 밑에
먼 곳에서 벗들은 술자리에 앉아 고기를 굽고 저녁 스며드네,
한 때 저녁이 오는 소리를 들으면 세상의 모든 주막이 일제히
문을 열어 마치 곡식을 거두어 들이는 것처럼 저녁을 거두어
들이는 듯 했는데,
지금 우리는 술자리에 앉아 고기를 굽네 양념장 밑에 잦아든
살은 순하고 씹히는 풋고추는 섬덕섬덕하고 저녁 스며드네
마음 어느 동그라미 하나가 아주 어진 안개처럼 슬근슬근 저
를 풀어 놓는 것처럼 이제 우리를 풀어 스며드는 저녁을 그렇게
동그랗게 안아주는데,
어느 벗은 아들을 잃고 어느 벗은 집을 잃고 어느벗은 다 잃고
도 살아 남아 고기를 굽네
불 옆에 앉아 젓가락으로 살점을 집어 불위로 땀을 흘리며 올
리네
잎들은 와르르 빛 아래 저녁 빛 아래 그렇게 그렇게 스며드는 저녁
저녁 스며드네
'시로 여는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태일 가을, 허정분 쥐 (0) | 2016.11.14 |
---|---|
김종해 천년 석불을 보다 (0) | 2016.11.13 |
허수경 기차는 간다, 이 가을의 무늬 (0) | 2016.11.11 |
이정록 生, 조문 (0) | 2016.11.10 |
홍해리, 장석주 입동(立冬) (0) | 2016.1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