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마지막 황실, 라스푸틴의 전횡과 최태민
러시아는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있으나 정치의 중심은 단연 유럽쪽이다
그러나 유럽의 절대왕정 국가들이 명예혁명이나 시민혁명을 거쳐 입헌군주제나 공화국으로 자리 잡아가고
나폴레옹의 정복전쟁을 통해 전 유럽에 자유와 평등사상이 퍼져나가던 근대국가로 발돋움하는 시기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못했던 러시아는 20세기까지 차르가 통치하는 로마노프 전제왕정이었고
1917년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공산국로 이행하게 될 당시 마지막 황제는 니꼴라이 2세였다.
이들 가족 얘기는 특히 '아나스타샤 ' 공주 얘기로 더 유명한데 따로 포스팅 하기로 한다
당시 황후는 딸 다섯을 낳은 이후 어렵게 얻은 황태자가 혈우병이어서 고민이 많았는데
라스푸틴이 혈우병(血友病)을 앓고 있던 황태자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의 병세를 호전시킨 공을 인정받아
니콜라이 2세와 황후 알렉산드라에게 신임을 얻고 궁정에서 총애를 받게되면서 세력을 휘두르게 된 인물이다.
언젠가는 터질 거였겠지만 대통령 박근혜가 최순실의 아바타였고, 그 인연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최태민이 언급되고
각 나라 정권 말기에 부당한 권력을 행사한 인물들이 거론되기에 이르렀다.
공민왕때 '신돈'이 등장하고 민비때 '신령군'이 나오기도 하는 와중에 '최태민은 라스푸틴과 같은 사람'이란
비유가 나오면서 '라스부틴'이라는 인물에 호기심과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미천한 출신으로 권력중앙부에 기회가 닿은 점, '요승'이나 '괴승' 이라는 사후의 평가로 보면 '신돈'과 비슷한 점이 있다
하지만 신돈은 당시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던 기득권 세력(권문세족)을 대상으로 개혁정치를 펴던 공민왕을 도와
일반 민중을 위한 정책을 폈고, 또 그들의 지지도 받았기에 라스푸틴보다는 신돈의 전횡이 한 수 위로
평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라스푸틴과 최태민이 오히려 비슷한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전횡의 시기는 최씨 일가가 더 길었던 것 같고 삶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결과도 최태민은 라스푸틴만큼
비참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최순실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더라도 말이다.
죽음을 앞두고 최태민이 재산을 박근혜에게 돌려주려 했다는 얘기가 있고, 그 때문에 최순실에 의해
죽임을 당한게 아니냐는 추측도 나오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그 근거로 고령이긴 하지만 최태민이 병원진료 후 퇴원해서 회복되고 있었다든지
그가 죽은 후 그 죽음이 은폐되어 이복형제들이나 박근혜에게도 알려지지 않고 은폐되기도 했고,
산소도 갑작스럽게 마련했다는 등의 이유, 다섯째 부인과 그 딸들의 첨문학적인 재산 불리기의 종잣돈이
그 시기 마련되었을 것이라는 점 등의 정보가 나오기도 한다.
라스푸틴은 귀족부인들을 농락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전횡을 일삼았지만 그 시기는 10년 남짓이었고,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여 그 죄의 댓가를 치뤘다고 보여진다.
심지어 그 신체 중 일부가 박물관에 진열되어 엽기적으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기도 한 모양이다
그러나 최태민과 최순실에 이어지는 40년 정도 전횡에도 불구하고 최태민은 천수를 누리고 자연사했고 2대에 걸쳐
자기 집안 일족을 위한 치부(致富)가 현재까지 진행형이다. 아직 끝이 아니어서 앞으로 두고봐야겠지만
최태민의 정체성은 거의 사이비 교주이고 이름이나 신분의 위장은 사기꾼 같은 분위기에
사생활도 거의 최악수준이라는 것, 최순실 역시 보통이하의인격 수준이어서
그들을 둘러싼 국정농단의 전횡정도를 알게 될수록 국민들이 갖게되는 모멸감과 참담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는 지경이다.
앞으로 어떻게 마무리가 될 것인가?
'사필귀정'이고 '인과응보'니 별로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지는 않다.
다른나라 역사이지만 정치사회의 밑바닥을 이루는 큰 원리는 결국 서로 통하기에 라스푸틴의 전횡과
그 황실의 최후가 어떠했는지 짚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라스푸틴
출생일 1872(?), 러시아 시베리아 튜멘 근처 포크로프스코예
사망일 1916. 12. 30(구력 12. 17),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년도 정확치 않으나 위 대로라면 44세)
농부 그리고리 예피모비치 노비흐는 학교를 다니기는 했지만 글을 몰랐으며 방탕한 생활로 인해 러시아 말로
'방탕한 사람'이란 뜻의 라스푸틴이란 성(姓)을 가지게 되었다.
18세 때에 개종한 것으로 보이며 여기저기 떠돌다가 마침내는 베르호투레에 있는 수도원으로 가 그곳에서
흘리스트(고행자) 종파를 알게 되었다. 그는 흘리스트 신앙을 왜곡해 인간은 '신성한 냉정함'을 느낄 때
신에게 가장 가까이 갈 수 있으며 이 상태에 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오랫동안의 방탕 뒤에 느끼는
성적 소진(性的消盡)을 경험하는 것이라는 이론을 세웠다.
그는 수도사가 되지 않고 포크로프스코예로 돌아왔으며, 19세 때 프로스코비아 표도로브나와 결혼하여
4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결혼생활도 그를 붙잡아두지는 못했다.
그는 집을 떠나 그리스의 아토스 산, 예루살렘 등지를 떠돌며 농민들의 헌금으로 생활했고,
환자를 고치고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으로 영적 지도자(starets)라는 명성을 얻었다.
이렇게 떠돌다가 마침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고(1903) 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교의 장학관인 테오판과
사라토프 주교 헤르모겐의 영접을 받았다.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궁정 사교계에는 신비주의와 비술(秘術)이 유행하고 있었으므로
눈이 빛나고 비범한 치료 능력을 가졌다고 하는 이 지저분하고 단정치 못한 방랑자는 사교계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1905년 황실에 소개되었으며, 1908년 황태자의 출혈소동이 또 한차례 벌어지고 있을 때 황궁으로 불려갔다.
그는 소년의 아픔을 달래는 데 성공했는데 최면술을 쓴 것으로 추측된다.
황궁을 떠나면서 황제와 황후에게 그 소년과 왕조의 운명은 자신과 피할 수 없는 인연을 맺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로부터 10여 년에 걸쳐 황제의 집안과 국정에 대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황제의 가족들 앞에서는 계속 겸손하고 신성한 농부의 모습을 보였으나 궁정 밖에서는 다시 예전의 방탕한 행각에 탐닉했다.
그는 자신과 육체적으로 접촉하면 정화(淨化)와 치료의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설교하며 정부(情婦)들을 얻었고
또 많은 여자들을 유혹했다. 그의 행실에 관한 얘기가 니콜라이의 귀에 들어갔을 때,
황제는 그가 성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비난한 사람들을
러시아의 오지(奧地)로 좌천시키거나 영향력 있는 자리에서 완전히 쫓아냈다.
1911년에 이르자 라스푸틴의 추잡한 행실은 모두에게 알려졌다.
총리 P.A. 스톨리핀은 황제에게 그의 비행(非行)에 관한 보고서를 올렸다. 결국 황제는 그를 추방했으나
알렉산드라는 몇 달도 안되어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아내를 화나게 만들고 싶지도,
아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도 않았던 황제는 앞으로 라스푸틴을 비난하는 말들을 무시하기로 했다.
1913년, 러시아 시민들은 라스푸틴과 같은 난봉꾼이 러시아 정세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에 분개했고,
이와 더불어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인해 황실의 명성은 바닥에 떨어졌다.
그해 로마노프 왕실은 300년 기념일을 맞았지만 대중은 그들 앞에 나타난 니콜라이 2세에게 싸늘한 반응만 보였다.
러시아의 제1차 세계대전 개입은 니콜라이 2세 시대의 종말을 의미했으며, 라스푸틴은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사이 러시아는 독일에 크게 패하면서 러시아의 왕권은 또 한 번 급격히 흔들렸다.
1915년 4월, 니콜라이 2세가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러시아군을 몸소 지휘하기 위해 전장에 나서면서
알렉산드라 여왕이 권력을 잡자 라스푸틴의 영향력은 정점에 달했다.
그는 교회 성직자 임명부터 각료 선출에 이르기까지 두루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종종 무능한 기회주의자들을
뽑았고 때로는 군사문제에도 개입해 국가에 해를 입히기도 했다. 어떤 특정 정치집단을 지지하지는 않았으나
전제정치나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맞섰다.
그를 죽임으로써 러시아의 재난을 막아보려는 시도가 몇 차례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마침내 1916년 펠릭스 유수포프 공(황제의 조카사위), 블라디미르 미트로파노비치 푸리슈케비치(두마 의원),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황제의 사촌)을 포함한 극보수파 무리가 그를 제거하고
추문에 싸인 군주제를 구하기 위해 암살을 모의했다.
12월 29~30일(구력 12. 16~17) 밤 라스푸틴은 유수포프의 집으로 초대되어 독약이 든 포도주와 차, 케이크를 먹었다.
그가 죽지 않고 멀쩡하자 놀란 유수포프는 총을 쏘았다. 라스푸틴은 쓰러졌다가 일어나 앞마당으로 도망쳤고
이번에는 푸리슈케비치가 다시 그를 쏘았다. 이렇게 해서도 죽지 않자 그들은 라스푸틴을
묶어 네바 강의 얼음 구멍에다 처넣었고 결국 그는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는 반성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러시아의 모든 지식인들이 왕실에서 쫓겨나고 라스푸틴의 아첨꾼들만 왕실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러시아는 혁명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게 되었고 몇 주일 뒤 제국의 모든 체제는 혁명에 휩쓸려 쓰러졌다.
혈우병을 앓던 황태자
니꼴라이 2세 가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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