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고영민 나무한권의 낭독, 김이안 책을 덮다

생게사부르 2016. 10. 20. 00:11

고영민


나무한권의 낭독


바람은 침을 발라 나무의 낱장을
한장한장 넘기고 있다
언제쯤 나도 저런 속독을 배울 수 있을까
한 나무의 배경으로 흔들리는 서녘이
한권의 감동으로 오래도록 붉다
얼마나 읽고 또 읽었으면
저렇게 너덜너덜 떨어져 나갈까
이 발밑의 낱장은 도대체 몇 페이지였던가
바람은 한권의 책을 이제
눈 감고도 외울 지경이다
또 章들이 우수수 띁겨져 나간다
숨진자의 영혼이 자신의 몸을 물끄러미 바라보듯
바람은 제 속으로 떨어지는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손바닥으로
받아들고 들여다보고 있다
낱장은 손때 묻은 바람 속을 날다가
끝내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밟힌다
철심같이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인적 드문 언덕에 구부정히 서서
제본된 푸른 페이지를 모두 버리고
언 바람의 입으로 나무 한 권을
겨우내 천천히 낭독 할 것이다


 

김이안

 

 

책을 덮다


당신은 오독했다
근거는 미약하다
당신이 간간히 긋고 간 밑줄들
연필이거나 볼펜이거나 혹은 노란 형광펜 자국으로 인해,
책 속의 흔적은 오독을 부인한다

-나는 분명히 읽었어!

그러나 당신이 읽고 싶은 것을
당신의 취향과 방식대로 읽었을 뿐,
당신은 처음부터 읽지 않았고
끝까지 읽지 않았고 혹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아직 당신 손바닥 위에 놓여 있다
냉정한 당신의 눈을 통해, 나는
시시껄렁하고도 복잡·난해한 나를 읽는다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다
예각이 기척을 하기 시작한다
읽다 만 111쪽 페이지를 접고 나는
책장 구석에 책을 잘 꽂아두기로 한다
당신은 읽히지 않는다
더 이상 오독의 위험은 없을 것이다
예각은 무뎌지지 않은 채
단지 우리는 잠시 서로 함구할 뿐,


- 《열린시학》(2013 가을호)- 

 

 

 

 

 

사진출처: 화요 시 창작교실 카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