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박연준-우산, 임승유-우산

생게사부르 2016. 10. 2. 09:01

박연준


우산


우산은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
이따금 한번씩은 비를 맞아야
동그랗게 휜 척추들을 깨우고, 주름을 펼수 있다
우산은 많은 날들을 집 안 구석에서 기다리며 보낸다
눈을 감고, 기다리는 데 마음을 기울인다

벽에 매달린 우산은, 많은 비들을 기억한다
머리꼭지에서부터 등줄기, 온몸 구석구석 핥아주던
수많은 비의 혀들, 비의 투명한 율동을 기억한다
벽에 매달려 온몸을 접은 채,
그 많은 비들을 추억하며

그러나 우산은,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


박연준 시집<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창비 2007

 

 

 

 

임승유

 

 

우산

 

 

늘의 날씨에 안감을 대고

단추를 만지작 거리지

단추는 구멍이 하나

단추는 구멍이 두개

구멍이 네개일 때는 외로움도 어려워져

 

글라디올러스

아스파라거스

발음을 하는 동안에도 자라는 이름을

지어주면

기분이 나아질거야

 

사탕을 녹여먹고

 

오늘의 날씨에 안감을 대면

앞다투어 아이들이 뛰어오고

뛰어오면서 녹는다

키스처럼

신발을 어디서 벗었는지 기억하지

않기로 하자

 

망고를 먹으면

망고의 기억을 갖게 되지

서로의 기억 속에 이빨을 박고

서로의 이빨을 빛나게 닦아주면서

 

 

 

1973. 충북괴산

2011 <문학과 사회> 신인상

시집: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봐'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