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하늘 통신에서 가져옴
미안하구나 내 추억아/ 윤석산
시위를 떠난 우리의 젊음은
어둠의 과녁을 관통한 채 아직도 부르르 떨고 있구나
떨고 있구나.
전신을 휘감던 내 슬픔의 갈기,
바다의 칠흑 속, 깊이 수장시키고
내 안의 빛나던 램프 아직도 당당히 빛나고 있구나.
관철동에서 혹은 소공동에서
또는 와이 엠 씨 에이 뒷골목에서,
웅숭이며 헌 비닐조각 마냥 서걱이며 나뒹굴던
우리의 빛나던 젊음.
그러나 오늘 술 마시고 고기 먹고 배불리어
이 길목 지나며,
아 아, 정말로 미안하구나 내 추억아.
어둠 속 빛나던 나의 램프여.
과녁을 향해 떠난 화살,
그 시위,
아직 부르르 내 안에서 떨고 있는데. 떨고 있는데......
- 시집『적寂』(시와시학사, 2000)
..............................................................................
도민준의 ‘별 그대’ 촬영지로 알려지는 바람에 한때 중국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뤄 노가 난 곳이 대학로 학림다방이다. 서울 문리대의 옛 축제 이름을 따 1956년 문을 연 학림다방 입구 현판에는 황동일이란 분(황동규 시인이란 설이 있으나 확인된 바 없음)이 쓴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학림은 아직도, 여전히 60년대 언저리의 남루한 모더니즘 혹은 위악적인 낭만주의와 지사적 저항의 70년대 어디쯤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나는 어느 글에선가 학림에 대한 이러한 느낌을 "학림은 지금 매끄럽고 반들반들한 '현재'의 시간 위에 '과거'를 끊임없이 되살려 붙잡아 매두려는 위태로운 게임을 하고 있다"라고 썼다. 이 게임은 아주 집요하고 완강해서 학림 안쪽의 공간을 대학로라는 첨단의 소비문화의 바다 위에 떠 있는 고립된 섬처럼 느끼게 할 정도이다. 말하자면 하루가 다르게 욕망의 옷을 갈아입는 세속을 굽어보며 우리에겐 아직 지키고 반추해야 할 어떤 것이 있노라고 묵묵히 속삭이는 저 홀로 고고한 섬 속의 왕국처럼... 이 초현대, 초거대 메트로폴리탄 서울에서 1970년대 혹은 1960년대로 시간 이동하는 흥미로운 체험을 할 수 있는 데가 몇 군데나 되겠는가? 그것도 한 잔의 커피와 베토벤쯤을 곁들여서...”
‘별 그대’의 극중 도민준이 여기서 장변호사(김창완)와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오랫동안 이곳에 살면서 참 정이 많이 들었나봅니다. 이제 지구를 떠나지는 않을 생각이지만 언제 생명이 다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이런 저런 옛 추억들이 엊그제 일처럼 떠오르네요. 장변호사님과 자주 오는 이 학림다방도 예전 서울대생들의 뜨거운 열정과 토론으로 가득했던 추억의 장소지요. 학생들은 학림다방을 제25강의실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청준, 전혜린, 천상병 그 친구들 아지트이기도 했는데 그 친구들과 함께 나누었던 시간들이 그립네요.”라고 회상한다. 도민준이 언급한 이들 말고도 학림에는 김승옥, 황동규, 김지하, 유홍준, 홍세화, 황지우, 김정환, 김민기 등이 뻔질나게 드나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태전인가 누추한 변절의 대가로 15억 정도를 챙긴 김지하는 “학림시절은 내게 잃어버린 사랑과 실패한 혁명의 쓰라린 후유증, 그러나 로망스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에게도 실패였지만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빛나던 젊음’들이 송두리째 실패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실패가 아니라면 오늘날 이 지경의 열패감과 환멸을 고스란히 떠안을 리가 없다. 60년대 문단의 대들보였던 김승옥은 광주민주화운동이후 지독한 자괴감에 시달리다가 아예 붓을 꺾었다. 안도현은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있는 한 시를 발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시대를 아파하던 젊음이 세속의 욕망을 뛰어넘으려 끊임없이 몸부림쳤고, 베토벤의 환희를 부를 그날을 위해 아낌없이 고뇌했건만, 아련한 로망스만 남고 혁명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젊음의 아픔이 이끼 낀 역사처럼 서성일 뿐 쟁취한 민주는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갔구나.
‘내 안의 빛나던 램프 아직도 당당히 빛나고 있’는데 잃어버린 시간을 어디에서 찾아야할지. 고난의 역사를 언제까지 지켜봐야할지. ‘미안하구나, 내 추억아’ 지금도 ‘과녁을 향해 떠난 화살, 그 시위, 아직 부르르 내 안에서 떨고 있는데. 떨고 있는데.....
권순진
'시로 여는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재기 상사화 (0) | 2016.10.03 |
---|---|
박연준-우산, 임승유-우산 (0) | 2016.10.02 |
전영미-아직도 모르겠니, 혼선 (0) | 2016.09.30 |
박소란-울지 않는 입술, 노래는 아무것도 (0) | 2016.09.29 |
유홍준-하지무렵, 들깻잎을 묶으며 (0) | 2016.09.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