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유홍준-하지무렵, 들깻잎을 묶으며

생게사부르 2016. 9. 28. 00:15

유홍준


하지무렵



밭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정지문 앞에
서서 수건을 벗어 펑펑 자신을 때리며
먼지를 털었다

그 소리가 좋았다 나는 밭에서 돌아 온
어머니가 먼지를 털고 끓여주시는
국밥이 좋았다

점심때는 늘 뒷산 멧비둘기가 구구 구구
목을 놓아 울었다 마당 가득 감자꽃이
피고 지고 있었다 바닥이 서늘한
마룻바닥에 앉아 나는 아무말도 안
하고 그 서럽고 가난하고 뜨거운 국밥
을 퍼먹었다

검불 냄새가 나는 수건이었다

평생 자신을 때리며 먼지를 털던
수건이었다

구구 구구 목을 놓아 울던 수건이었다

깨끗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은
수건이었다

어머니가 벗어 놓으면 꼼짝도 않고
어머니를 기다리던 수건이었다



들깻잎을 묶으며


추석날, 어머니의 밭에서
동생네 식구들이랑 어울려 깻잎을 딴다
이것이 돈이라면 좋겠제 아우야
다발 또 다발 시퍼런 깻잎 묶으며 쓴웃음을

날려 보낸다
오늘은 철없는 어린것들이 밭고랑을 뛰어다니며
들깨가지를 분질러도 야단치지 않으리라
가난에 찌들어 한숨깨나 짓던 아내도
바구니 가득 차오르는 깻잎 이파리처럼 부풀고
맞다 맞어, 무슨 할 말 그리 많은지
소쿠리처럼 찌그러진 입술로
아랫고랑 동서를 향해 연거푸 함박웃음을

날린다
어렵다 어려워 말 안해도 빤한 너희네 생활,
저금통 같은 항아리에 이 깻잎을 담가

겨울이 오면 아우야
흰 쌀밥에 시퍼런 지폐 척척 얹어 먹자 우리
들깨냄새 짙은 어머니의 밭 위로 흰구름
몇 덩이 지나가는 추석 날
동생네 식구들이랑 어울려
푸른 지폐를 따고 돈다발을 묶어보는
아아, 모처럼의 기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