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복효근- 느티나무로부터, 상수리나무 스승

생게사부르 2016. 8. 21. 00:12

복효근


느티나무로부터



푸른 수액을 빨며 매미 울음 꽃 피우는 한낮이면
꿈에 젖은 듯 반쯤은 졸고 있는 느티나무
울퉁불퉁 뿌리, 나무의 발등
혹은 발가락이 땅위로 불거져 나왔다
군데군데 굳은 살에 옹이가 박혔다

먼길 걸어 왔단 뜻이리라
화급히 바빠야 할 일은 없어서 나도
그 위에 앉아 신발을 벗는다
그렇게 너와 나는
참 멀리 왔구나 어디서 왔느냐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느냐
어디로 가는 길이냐 물으며 하늘을 보는데
무엇이 그리 무거웠을까 부러진 가지
껍질 그 안쪽으로
속살이 썩어 몸통이 비어가는데
그 속에 뿌리를 묻고 풀 몇 포기가 꽃을 피워
잠시 느티나무의 내생을 보여준다
돌아보면
살은 커다란 상처 혹은 구멍인데
그것은 또 그 무엇의 자궁일지 알겠는가
그러나 섣불리
치유를 꿈꾸거나 덮으려 하지 않아도 좋겠다

때아닌 낮모기 한 마리
내 발등에 앉아 배에 피꽃을 피운다
잡지 않는다
남은 길이 조금은 덜 외로우리라
다시 신발끈을 맨다


2005. <목련꽃 브라자>, 천년의 시작


상수리나무 스승


이 마을 숲엔 몇 십년 묵은
아름드리 상수리나무가 모여산다
하나같이 허리께에 커다란 웅덩이 같은 상처가 있다
그 옛날 마을 사람들 떡메를 지고와서
나무둥치를 쳐 울려 상수리를 땄기 때문이다
나무를 쳐댈 때마다
나무는 굵은 눈물 같은 상수리를 한 소쿠리씩
쏟아 냈을 것이다
벗겨진 제 상처를 안으로 오그리며
나무는 하늘로 더 멀리 가지를 뻗었을 것인데
그 가지 끝에 새들이 둥지를 틀었다
썩어가는 둥치 속으론
버섯이 자라고
청개구리가 기어들고
또 풍뎅이가 알을 깐다
내가 다가갈 때마다
나무는 무슨 이야기 같은 것 혹은 노래 같은 것을
이것들의 입으로 날개짓으로 들려 주곤 하는데
내 살아 갈 길을 넌지시 들려 주는 것도 같은데
한 계절도 아니고
한 해로도 끝나지 않아서
아예 이 숲에 살림을 차려서 모시고도 싶다

 

2009. <마늘촛불>, 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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