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주
못은 밤에 조금씩 깊어진다
어쩌면 벽에 박혀 있는 저 못은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깊어지는 것인지 모른다
이쪽에서 보면 못은
그냥 벽에 박혀 있는 것이지만
벽 뒤 어둠의 한가운데서 보면
내가 몇 세기가 지나도
만질수 없는 시간 속에서 못은
허공에 조용히 떠 있는 것이리라
바람이 벽에 스미면 못도 나무의 내연(內緣)을 간직한
빈 가지처럼 허공의 희미함을 흔들고 있는 것인가
내가 그것을 알아본 건
주머니 가득한 못을 내려놓고 간
어느 낡은 여관의 일이다
그리고 그 높은 여관방에서 나는 젖은 몸을 벗어두고
빨간 거미 한마리가
입 밖으로 스르르 기어나올 때까지
몸이 휘었다
못은 밤에 몰래 휜다는 것을 안다
사람은 울면서 비로소
자기가 기르는 짐승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문학과 지성,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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