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그 / 유계영
깃발보다 가볍게 펄럭이는 깃발의 그림자
깃에 기대어 죽는 바람의 명장면
새는 뜻하지 않게 키우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은
알아서 찾아왔다는 사실이다
창밖의 무례한 아침처럼
그러니까 다가올 키스처럼
어떻게 두어도 자연스럽지 않은 혀의 위치처럼
새는 뜻하지 않게 시작된 것이다
새가 머무는 날
홀쭉한 빛줄기에 매달리는 어둠을 쪼며
짧게 나누어 자는 잠
그런 잠은 싫었던 거야
삼백육십오 일 유려한 발목의 처녀처럼
하나의 목숨으론 모자라
죽음은 탄생보다 부드러운 과정
새는 알을 남기고 간 것이다
나는 알을 처음 본 게 아니지만
곧 태어날 새는 어미를 전혀 알지 못한다
알 속의 혀가 입술의 위치를 짚어 보는
그런 명장면
* 해설/ 이원
이 그림은 도미노일까요. 만다라일까요. 제 속에 알을 품고 있는지 새는 몰랐다나요.
제 속에 새를 품고 있는지 새 속의 알도 몰랐다나요. 새 속의 알 속의 새만 혀라는 것을 사용해
입술의 위치를 가늠해보고 있었다나요. 소름이 생겨난 때라나요
신선함만큼 섬세함도 중요하죠. 홀쭉한 빛줄기에 매달린 어둠을 쪼았죠.
그럴수록 유려한 발목을 갖게 되는지는 모르면서요. 새를 닮은 그러나 새는 아니었던 바,
나는 부러지기 쉬운 발목과 죽음은 부드럽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조곤조곤 또박또박.
이런 화법을 가졌다면, 제 손으로 쓰러뜨린 도미노를 들어 한 장 한 장에 숨겨진 그림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죠.
세상의 그림은 당신이 생각한 것처럼 되어 있지 않다니까요.
당찬 언어로 그리고 말하죠. 물론 새는 뜻하지 않게 키우게 된 것인데,
중요한 것은 알아서 찾아 왔다는 사실.
깃에 기대어 죽는 바람의 명장면. 알 속의 혀가 입술의 위치를 짚어보는 그런 명장면.
어쩌라고 알을 남기고 간 새가 있으니, 어쩌라고 나는 알을 처음 본 바가 아니니,
또 하나의 명장면은 임박한 것인가요. 알 속에서 새를 만나는 것은 나의 몫인가요.
알 속 알알알 소용돌이. 이미 퍼덕임은 시작되었죠. 물론 뜻하지 않게요.
에그. 에그머니! 독자 일인은 이러려다 그만두는 참.
1985. 인천
2010. 현대문학 신인 추천
시집. <온갖 것들의 낮> 민음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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