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이규리- 엘리베이터 꽃, 보랏빛이라는 것

생게사부르 2016. 8. 4. 01:38

이규리


엘리베이터 꽃


타래난초가 층층 손톱 불 켜 들고
엘레베이터 안으로 등을 밀어넣었다
올라가세요
꽃잎들 차례로 누르면 엘리베이터
단추에 불이 온다
꽃잎 하나의 욕망, 꽃잎 둘의 맹목,
꽃 핀 정거장 마디마다 끼워 넣었던
문 열고 누가 일기장을 훔쳐본다
어디쯤에서 미농지 같은 사춘기가 찢겨 나가고
몇 사람의 애인들이 가고 오지 않았다
저 먼 아래
녹슨 철문의 빗장지를 때마다
끼익 몸을 긋던 소리
빗금으로 파인 흔적들,
빗장도 없는 엘리베이터가
실어주는 꿈은 날렵하지만
지나치는 층 층 마다 삶의 문들이
꽉 닫혀있다
욕망의 맨 꼭대기 층, 엘리베이터가 멎고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신발 가지런히 벗어 놓고
옥상 난간을 발끝으로
민다
투신,
타래 난초가 찌익, 눌렸다

 


 

 

사진출처 : 여고밴드, 정숙희

 

 

 

보랏빛이라는 것

 

 

왜 미안하다고 말했을까 네가 맥문동과 나란하다.

달빛 아래서 맥문동을 보면 결핵 빛깔이다 세계를 투

정하고 세상을 밀어내던 내가 꽃보다 오래 산다는 건

미안하다 맥문동은 흔들리면서 생을 완성한다 너는

외대에 닿는 흰 바람조차 붙들고 싶었던가 일획 단정

한 잎들이 단명과 유사하다면 맥문동은 네 기침이 피

우는 꽃, 비 오는 날은 더욱 자지러진다 생이 기우뚱

풍경들을 놓칠 때 왜 보랏빛일까 무 큰 신발을 신

고 숨차 오르던 여름 내내 돌아보면 굽이마다 맥문동

보였다 보랏빛 네 단명 앞에 탕진하듯 내 살아 있음

이 미안 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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