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문태준-묶음, 백년

생게사부르 2016. 5. 16. 01:32

문태준

 

묶음

 

 

꽃잎이 지는 열흘 동안을 묶었다
꼭대기에 앉았다 가는 새의 우는 시간을 묶었다
쪽창으로 들어와 따사로운 빛의 남쪽을 묶었다
골짜기의 귀에 두어마디 소곤거리는 봄비를 묶었다
난과 그 옆에 난 새 촉의 시간을 함께 묶었다
나의 어지러운 꿈결은 누가 묶나
미나리처럼 흐르는 물에 흔들어 씻어 묶을 한 단

 

 

백년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빈 의자처럼 쓸쓸히 술을 마셨네

 

내가 그대에게 하는 말은 다 건네지 못한 후략의 말

 

그제는 하얀 앵두꽃이 와 내 곁에서 지고

오늘은 왕버들이 한 이랑 한 이랑의 새잎을 들고 푸르게 공중을 흔들어 보였네

 

단골 술집에 와 오늘 우연히 시렁에 쌓인 베개들을 올려보았네

연지처럼 붉은 실로 꼼꼼하게 바느질해놓은 백년이라는 글씨

 

저 백년을 함께 베고 살다간 사랑은 누구였을까

병이 오고, 끙끙 앓고, 붉은 알몸으로도 뜨겁게 껴안자던 백년

 

등을 대고 나란히 눕던, 당신의 등을 쓰다듬던 그 백년이라는 말

강물처럼 누워 서로서로 흘러가자던 백년이라는 말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하루를 울었네

 

                                                   시집 <그늘의 발달> 

 

1970. 경북 김천

1994. 문예중앙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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