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희
진부령 가는 길
어느 해 여름인가 K와 진부령 계곡을 지나다가
영원히 사랑하자는 편지를 바위 밑에 두었다
몇 해가 지나 그곳을 지나다가 보았는데
물길은 바뀌고 바위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 편지는 강을 지나다 수초에게 속삭였을 것이다
사랑에 대해서
바다에 닿아 잉크가 옅어질 때까지
누군가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사랑이란 글자를
......
수평선의 직선을 지우려 포말이 일고
지평선의 직선을 지우려 풀이 자라고
산의 형상을 지우려 머루나무가 자라고
나무의 그림자를 지우려 딱따구리가 살고
......
마천루를 하늘이 안고 있다
비행기가 남긴 연기를 구름이 지운다
2016 시와 소금 봄호
노마드
초지를 찾을 수 없어서 집을 짓기
시작했지
바닥을 놓으니 땅의 노래를 들을 수
없었다
기둥을 세우니 풍경이 상처를 입는다
지붕을 만드니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없어서
낮에는 갈 곳이 없었고 밤에는 무엇엔가
쫒겼어
내가 지상에서 바라는 것 하나
우루무치행 편도 티켓 하나
* * *
질 들뢰즈에 의하면 진리는 늘 생성의 과정에 있기 때문에 구축(構築)의 감옥을 거부한다.
그것은 유목민(노마드)처럼 끝없이 탈주한다.
집을 짓는 정주(定住)의 삶은 역설적이게도 “땅의 노래”를 들을 수 없게 하고 “풍경”에 상처를 입히며,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한다.
시인이 지상에서 바라는 유일한 것은 “우루무치행 편도 티켓 하나”이다.
그는 정주를 거부하며 고원(高原)에서 고원으로 이어지는 탈(脫)영토화의 삶을 꿈꾸고 있다.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출처: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노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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