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정끝별 크나큰 잠, 와락

생게사부르 2016. 5. 4. 01:27

크나큰 잠/정끝별

 

 

 

한자리 본 것처럼
깜빡 한여기를 놓으며
신호등 앞에 선 목이 꽃대궁처럼 꺾일 때
사르르 눈꺼풀이 읽던 행간을 다시 읽을 때

 

봄을 놓고 가을을 놓고 저녁마저 놓은 채

갓 구운 빵의 벼랑으로 뛰들곤 해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사과냄새 따스한

소파의 속살 혹은 호밀빵의 향기

출구처럼 다른 계절과 다른 바람과 노래

 

매일 아침 길에서 길을 들어설 때

매일 저녁 사랑에서 사랑을 떠나보낼 때

하품도 없이 썰물 지듯

깜빡깜빡 빠져나가는 늘 오늘

 

깜빡 한소식처럼

한지금을 깜빡 놓을 때마다

한입씩 베어먹는 저 큰 잠을 향

얼마나 자주 둥근 입술을 벌리고만 싶은가

 

벼락치듯 덮치는 잠이 삶을 살게 하나니

부드러워라 두 입술이 불고 있는 아침의 기적

영혼의 발끝까지 들어올리는 달콤한 숨결

내겐 늘 한밤이 있으니

한밤에는 저리 푹신한 늘 오늘이 있으니

 

 

 

               - 2008. 제 23회 ,<소월시 문학상> 대상 수상작

 

 

 

와락

 

 

반 평도 채 못되는 네 살갗

차라리 빨려들고만 싶던

막막한 나락

 

영혼에 푸른 불꽃을 불어 넣던

불후의 입술

천번을 내리치던 이 생의 벼락

 

헐거워지는 너의 팔 안에서

너로 가득 찬 나는  텅빈,

 

허공을 키질하는

바야흐로 바람 한자락

 

 

 

1964. 전남 나주

1988. 문학 사상 <칼레의 바다>

 

 

*        *        *

 

 

부사들의 존재론/권혁웅

 

 

코키토와 모나드 유물론과 휴머니즘과 정신분석과 같은 실체로서의 존재론(명사)  ,

연기설 분열분석 태극도설과 상선약수(上善若水) 변증법은 운동으로서의 존재론(동사)과 

상태로서의 존재론(형용사)이라면 부사로서의 존재론이 가능할까

 

부사는 처음부터 의미의 창조와 소멸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그것의 증감, 이동, 변형에 관계된 것으로

부사는 근본적으로  + - = 와 같은 연산식으로 표시된다

부사는 강조하고 삭감하고 반복하고 변형하지만 기본적으로 기생 혹은 기숙(기숙)의 운명을 타고 났다

부사는 동사와 형용사의 더부살이며 동사 형용사에 붙지 않으면 존재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대명사 존재론이 있고(유명론은 실체의 그림자에 대한 존재론이라는 점에서)

관형사 존재론이 가능하다면(우리말에서 관형사는 실체의 더부살이가 아니라 실체와 유관한 동작이나 상태다)

부사적 존재론도 가능하지 않을까

 

' 겨우' 존재하는 것들, ' 희미하게' 감지되는 것들, 다른 움직임과 형용의 외연과 내포를 제한하거나

확장하는 가운데 식별되는 것들의 삶 말이다

명사와 동사와 형용사에 포획된 존재가 아니라, 그것들을 수식하면서 동시에 지배하는 부사

 

결론적으로 부사가 실체를 지시하지도 그것의 움직임과 상태를 표시하지 않음에도

이 시' 와락'은 존재적 부사나 존재론적 부사가 가능함을 보여주는 시다

 

' 껴안다'라는 동사에 더부살이하는 '와락', 동사는 사라지고 부사만이 남아서 저렇게 표제에 올랐다.

와락은 급하게 대들거나 잡아당기는 모양이다.

' 껴안다'가 안음의 주체보다 안음의 운동을 중시한다면 와락은 안음의 운동보다 그것의 급박함과 절실함을 중시한다.

그러니까 부사라는 존재형식은 주체와 운동보다는, 운동의 강도와 정도로 측정되는 존재형식이다.

적어도 이 시에서  와락'은 ' 껴안다'라는 운동과 그 껴안음의 주체(나)와 대상(너)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거느린다. 무릇 포옹이란 포옹하는 순간의 강렬함과 포옹하는 힘의 크기로만 측정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 와락'은 시가 진행되면서 " 나락"과 "벼락"과 바람 한 "자락"으로 변화한다.

 

말놀이(pun)는 의미가 아니라 소리의 유사성을 타고 미끄러진다는 점에서, 부사적인 용법에도 잘 들어맞는다

유사한 의미가 붙들어 매는 것이 실체인데 반해, 유사한 소리가 담보하는 것은 박절拍節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전변이 사실은 '와락'에 포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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