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여행의 기록

미완의 혁명 4.19

생게사부르 2016. 4. 19. 23:52

미완의 혁명 4․19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

 자유의 총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원임을 자랑한다.“ (4월 혁명 선언문)


이승만 정부의 독재화

이승만 정부는 집권 후 부패 척결이나 친일파 청산 등 민중의 요구에는 소극적으로 대처하면서

권력을 강화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로 인해 민심은 점차 등을 돌렸다.
1960년 3월 15일, 제 4대 대통령과 제 5대 부통령을 뽑는 선거가 실시되었다.

자유당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대적인 부정 선거를 자행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의 부정 선거는 국민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타오른 민주주의 불꽃, 4․19혁명

선거 당일 오후 이미 마산에서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학생과 시민의 시위가 벌어졌다.

경찰은 이를 무력으로 잔인하게 진압하였고, 약 한 달 후 실종되었던 한 고등학생(마산상고, 김주열)의 시체가

마산 앞 바다에서 발견되었다. 시위를 하던 학생이 최루탄에 맞고 사망하자, 몰래 바다에 던져버렸던 것이다.

 분노한 마산의 학생과 시민들은 다시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정부는 마산 시위의 배후에 공산 분자가 있다고 몰아세웠으나, 오히려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4월 18일 고려대생 3천여 명이 국회 의사당 앞에서 연좌 시위를 한 후 귀교 길에 이정재를 두목으로 하는

반공 청년당등 정치 깡패들의 습격을 받아 수십 명이 부상당하는 사태가 발생 한 것이 기폭제가 되었다.

 자유당 정부의 무모한 행위는 오히려 정의에 찬 학생들의 가슴을 더욱 뜨겁게 달구었다.

4월 19일 화요일 오전, 국회의사당 앞에 10만에 달하는 학생들이 저지선을 뚫고 모여들었다.

 학생들은 정오 무렵 완전 무장을 한 경찰이 저지선을 펴고 있는 중앙청으로 돌진하였다.

그러자 경찰이 학생 시위대에 총을 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총을 맞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전국적으로 186명이 사망하고 6,026명이 부상당했다.

정부는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기 시작한 직후 서울 등 주요 도시에 비상 계엄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국민의 저항은 더욱 거세지고, 시위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폭도 넓어 졌다.

당황한 이승만은 부정 선거를 인정하여 선거를 다시 실시하고, 자유당과 관계를 끊겠다는 수습책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국민은 이제 부정 선거 무효뿐만 아니라 이승만의 퇴진 자체를 요구하였다.

자신을 지원하던 미국까지도 들을 돌리자, 결국 이승만은 대통령직을 내어 놓고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미완의 혁명

이승만 정부가 물러난 다음, 내각 책임제와 국회의 양원제를 핵심으로 하는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고

 민주당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대통령에 윤보선, 국무 총리에 장면이 선출되면서 제 2공화국이 출범되었다.

4․19혁명 후 사회 각계 계층에서는 민주화의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다. 학생들은 학원 민주화 운동을 벌였으며,

 노동 운동과 청년 운동도 활발하였고, 부정 부패 척결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다.

 무엇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통일에 대한 열망으로 학생과 진보적 사회 운동 세력은

자주, 민주, 평화의 원칙 아래 남북 협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원래 보수적 인사들로 구성된 민주당 정부는 당내 파벌 사이의 권력 다툼에만 열중한 채,

이러한 사회적 요구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4․19혁명의 이념을 실천에 옮기려고 하지 않았다.

 부정 선거 책임자나 부정 축재자의 처벌에는 소극적이었으며, 오히려 각종 법을 만들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나 사회 운동을 억눌렀고, 특히 남북 협상에 대해서는 극히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결국, 사회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열망은 꽃을 피우지 못하다가 5․16 군사 쿠데타(1961년)로 꺽이고 말았다.

 이에 따라 이 땅에 참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 준 4월 혁명은 미완의 혁명으로 끝나 버렸다.

 

 *           *           *

 

" 과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

과거의 역사적 경험에서 뭔가를 배우고 얻지 못하면 밝은 미래를 기대하기 어렵다

 

56년 전 4월의 그날,

광화문 세종로 종로 일대를 노도와 같이 휩쓸던 젊은 함성들. 

"사악과 불의에 항거하여 압제의 사슬을 끊고 분노의 불길을 터뜨린"

민족사에 영원히 꺼지지 않을 민주의 횃불 4월혁명. 

 

무심히 세월은 흘러 그날로부터 환갑이 다 되어 가는 세월이 흘렀건만 혁명은, 그날의 희생은

 "승리한 민중의 역사"로 자리잡지 못했고 상흔은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다.

그때 치우지 못한 혁명의 찌꺼기들은 오히려 수십년 동안 더깨로 쌓이고 쌓여 더욱 기승을 부리며

온갖 질병과 해악을 이 땅에 뿌리고 있다는 것이 더 문제...

 

이번의 총선은 또 다른 방법의 '국민 심판"이란 의미에서 '선거혁명'의 의미가 있다.

" 껍데기"들 일부는 청산된 분위기가 일부 있지만,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고 그중 최상위

집권의 중심세력은 남았다는 것...대선까지의 분위기를 관심 있게 주시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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