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송수권-산문에 기대어, 여승(女僧)

생게사부르 2016. 4. 7. 15:11

송수권 2


 

산문(山門)에 기대어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강의 밤이 일어 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속에서 튀는 물고기 같이
살아 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山茶花) 한 가지 꺾어 스스럼 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던 것을
내 한잔은 마시고 한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 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여승(女僧)

 

 

어느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종일 방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아래 고깔 쓴 여승(女僧)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과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 할 순 없지만

우리집 처마 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 발치로 바릿대를 든 여승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 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소승에겐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온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로 뒤돌아 뛰어오며 열에 허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여승이 우리들 손이 닿지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여승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事物)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시(詩)를 쓴다

 

 

 

 사진 출처: '푸른 시인학교' 정미영님이 받아서 카톡방에 올렸던 사진입니다.

 구례 화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