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근
흑백시대
진해의 봄 흑백 다방에 앉아
가버린 시대의 흑백 사진을 생각한다
빛바랜 사진첩의 낡은 음계를 딛고
그 무렵의 바람같이 오는 길손
잠시 멍한 시간의 귀퉁이를 돌다
바람벽 해묵은 아픔으로 걸렸다가
빛과 색채와 음악이 함께 과거가 되는
그런 주술적 공간에 앉았노라면
시대를 헛돌며 온 바람개비
아무것도 떠나 간 것이라곤 없구나
김창근: 1942. 부산
흐드러진 벚꽃....눈부신 물빛...먼저간 自由人이여
진해에 흑백다방이란 곳이 있답니다
화가였던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딸이 운영했던 진해문화의 등대
아버지는 삐걱이는 목조계단을 올라 그집 이층 화실에서
평생 그림을 그렸고 딸은 아버지가 일하는 동안
베토벤 피아노 트리오곡을 연주하여 茶香처럼 올려보냈답니다
그 사이 바람불고 비 내리고 꽃잎 분분하게 날리며
세월이 흘러 아버지는 수백점의 그림을 남겨둔 채
북청 고향길보다 먼 하늘길로 떠나고
이제는 홀로 남은 딸이 밤마다 아버지를 위해 헌정의 곡을 치는 곳
이곳이 진해의 흑백다방이랍니다
일본식 목조가옥 그대로인 흑백다방 이층에서
맞은편 장복산이 비안개에 잠기고
진해 앞바다의 물빛이 눈부시게 푸르러질 때 마다
두 눈이 짓무러도록 붓질을 멈추지 않았던 화가 유택렬은
그 잘난 중앙화단에서 눈길 한번 주지 않아도
무심한 세월에 말하는 법 없고
虛名에 허기진 적 없었던 크고 넉넉한 자유인
하나의 아름다움이 익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의 슬픔과 고독도 함께 깊어져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
김병종교수의 <화첩기행>칼럼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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