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여행의 기록/마산에서 살기

창원 읍성

생게사부르 2020. 8. 23. 09:54

창원 읍성(邑城)

 

 

창원에도 그런 게(읍성) 있었어?

 

 

창원시 문화도시 지원센터 '시민문화공간 발굴단' 2차활동은 창원 읍성이었어요.

(이미 한 달 전이지만 ㅠ)

그날 찍은 사진을 받아 본 몇몇 지인들의 첫 반응이 위와 같았습니다

바로 그 부근에 사는 사람도 있었고요. 그 반응 충분히 이해가 갔습니다

 

마산은 역사가 오래되고 토박이들이 여전히 많이 살고 있는 곳이지만

창원은 1980년대 이후 30여년만에 대한민국 최고의 지방도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현대적인 계획도시에 공단과 산업도시의 대표 도시기도 하니까요

 

제 학창 시절까지만 해도 창원은 마산에 비해 허허벌판(?)이었다 할지

39사 훈련소가 있다는 소문외에 별로 아는 것도 들은 것도 없었고

창원 사는 아이들이 마산으로 진학을 해 나와 학교 가까운 곳에서 자취를 하곤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산은 근대 개항(1889) 이후 꾸준히 도시로 발전해 왔고, 3.15 4.11를 통해 4.19혁명의

단초를 제공했으며 수출자유지역이 들어서 한때 전국 7-8대 도시에 속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런 상황에서 창원이 현대도시로 도약하여 2010에는 마산 진해까지 통합을 하였으니

마산 진해 사람은 이사를 가지 않아도 주소 앞에 창원시가 붙게 되었고, 같은 도시권인데

부동산 가격에 민감한 사람들은 마산 사는 사람들 이해를 못하겠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으니

하여튼 서울 강남사람들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을 거의 동시간별로 흡수하여 여러 부작용까지

국물이 튀는 판에... 역사책 속에나 나올법한 ' 읍성' 이라 ...현실감이 떨어지기도 하겠네요

 

 

왕조체제의 전근대 국가에서는 왕이 항복하면 나라가 다 패한 것이어서 보통 궁궐이 있는 수도 전체를 

성으로 둘러싸게 되는 도성이 있습니다.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은 4대문 4소문을 두어 아침저녁으로 문을 여닫고 출입을 통제하고요.

 

읍성은 지방의 치소, 관공서인 관부(官府)와 주민 주거지인 민거(民居)를 둘러쌓은 성을 지칭하는데

주로 고려에서 많이 보이고 조선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

 

 

 

1899. 창원읍 지도

 

창원 읍성은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북동|중동|소답동에 걸쳐 있던 조선 전기

창원도호부의 치소(治所) 외곽을 옹위하던 성이었습니다

 

창원읍성 역시 사대문이 있었는데 동문지에 일부 남아있던 성벽도 요즘은 보기 어렵고 흔적만 있는 북문지는

역시 안내문만 덩그러니 서 있으며 나머지는 창원시 개발과정에서 다 사라졌습니다.

 

 

 

 

 

고려말 혼란기에 들어오기 시작하던 왜구는 남해안 뿐 아니라 강을 타고 내륙지방까지 올라가

곡식을 약탈하는 등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쳤습니다.

 

낙동강을 타고 안동까지 올라가는 등 남해안 곳곳에서 피해가 많았는데

조선건국 이후에도 근절 되지 않아 세종 때 이종무가 왜구 근거지인 쓰시마 토벌을 나서기도 했습니다.

 

바닷가를 끼고 있는 창원도 예외가 아니어서 효과적인 방어책의 일환으로

1410(태종 10) 창원부염산성(簾山城)을 수축하였고 1430년 연말에는 합포의 성을 쌓는 일이 진행되었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창원읍성의 축성 문제에 대한 의견이 세조 때 등장합니다.

 

 창원부 병마절제사의 군영은 합포에 있었는데, 합포의 성을 쌓는 일은 1430(세종 12) 연말에 진행되었습니다. 

바다 어귀에서 4리 떨어져 있는데, 둘레가 588보이며, 절제사군영의 성은 둘레가 3,775, 높이가 12 6, 

성가퀴의 높이가 1 8치이며 적대는 12개였다. 

성문은 4개인데 옹성이 있으며, 성가퀴는 635개이고 해자의 둘레는 4,060자이, 성안에 우물 7개가 있었다.

 

 

세조 창원읍성을 쌓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창원은 절제사 군영(합포)과 아주 가깝고

절제사 군영의 성곽이 넓기 때문에 따로 읍성을 쌓을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있어 결론이 나지 않은 채

 당시 군자감 창고가 군영의 성곽 안에 있었으나 의창은 부에 있었으므로 군영의 성곽 안으로 옮겼습니다

 

창원읍성1476(성종 7)부터 쌓게 되었고, 147710월에 완공했는데,

높이가 127촌이고, 둘레가 4,410척이었습니다170여 년 후인 1649(효종 1) 10월에

창원읍성을 개축(改築)상황이 창원부읍지(昌原府邑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돌로 쌓은 석축이었고 둘레는 2004, 곡성(曲城)18, 옹성(甕城)4, 여첩(女堞)600곳이었으며,

남문의 이름은 진남루(鎭南樓), 동문은 향양루(向陽樓), 서문은 망미루(望美樓), 북문은 공북루(拱北樓)라고

각 루의 이름을 처음 지었다고 하고 또한 북수문(北水門) 안에는 우물 두 곳과 못이 하나 있는데,

이것은 1621(광해군 13) 4월에 부사 금변(琴忭)이 쌓았다고 .....


                                   - < 창원 디지털 문화 대전>

 

 

 

 

어떻든 창원 읍성은 창원시 의창동에 속한 북동중동 소답동 일대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천주산구룡산 하단부에 해당합니다.

 

창원초등학교 (1907~1915~)신축과 도시화 개발 과정에서 창원 읍성은 심하게 훼손되었습니다.

동문지로 추정되는원형이 남아 있는 449-1번지 부분의 성벽을 따라 주택 사이사이에 있는 성의 기단부를 따라

남문지까지 성벽의 상부는 결실되었지만 성벽의 기단부 1단 정도는 잔존하고 있었습니다.

2005년, 2010년 최근으로 올수록 흔적이 줄어들고 있는데 일부는 땅에 묻어 놓기도 했답니다.

언제 복원이 될런지...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성벽 주변이 미나리 재배지와 논으로 사용되었고, 물이 흘렀다고 해요.

이 범위는 성벽에서 밖으로 약 10m 정도인데, 읍성의 해자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동문지와 남문지는 둥글게 돌아가는 옹성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었고, 60~70년 전에는 남문지와 서문지 부분도

일부 남아 있었으나 그 이후 건물들이 신축되면서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참고 : 읍성 邑城

 

 

()이라는 말 자체가 처음부터 성으로 둘러싸인 취락을 의미하나, 종묘와 왕궁이 있는 도성(都城)과는 구별하였다.

 

중국에서는 읍성이 이미 청동기시대에 축조되어서 국가의 기원이 읍제국가(邑制國家)에서 출발하였으나,

우리 나라의 경우 언제쯤 읍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지 분명하지 않다.

 

고조선의 경우 도성인 왕검성(王儉城) 이외에 읍성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나라의 군현(郡縣)이 설치되었던 평안도·황해도 지역에는 낙랑의 치소(治所)로 토성이 남아 있고,

대방군(帶方郡)의 치소였던 토성도 사리원 동쪽에 남아 있다. , 이 시기의 현()에도 작은 읍성이 있었다고

하며 이들은 관청건물과 지배층이 사는 일부지역을 토루(土壘)로 돌려쌓고 있으며,

넓은 평야를 낀 평지나 낮은 구릉에 위치하였다.

 

삼국시대에는 산성과 읍성이 따로 축조되었다고 할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으나,

지방의 주요한 도시를 둘러싼 읍성이 산성과 같이 산을 의지한 위치에 있었던 흔적이 밝혀지고 있으며

통일신라 때에는 9()5소경(小京)에 읍성이 축조되었던 기록(신문왕)이 있다.

 

이 때의 읍성들이 어떠한 형태와 지형조건에 의하여 축조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지형의 평야에 네모꼴로 축조한 다음 일정한 구획을 나누었던 읍성들이 후대까지

계속 수개축(修改築)을 하여온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읍성들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주변의 산성들로 보아서는 유사시에는 인근의 산성에

입보(入保안에 들어와 보호를 받음)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이러한 유형과는 달리, 백제 말기에는 산성의 형태가 차츰 계곡의 아랫부분까지 포함하면서 넓어지고 있어서,

읍성의 기능을 포용하는 단계에 이른 것으로 판단되는 것들이 존재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주요 지방도시에 읍성이 축조되었고 ,

고려 말기까지는 규모가 작은 토축 (土築 )의 읍성들이 상당수 존재하였다 .

이들 읍성들이 조선왕조에 이어졌으며 ,

차츰 석축 (石築 )으로 고쳐지거나 호구 (戶口 )의 증가에 의해서 넓게 고쳐 쌓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

 

특히 , 고려말 혼란기에 창궐하던 왜구가 조선 들어서도 끊이지 않아 세종 때부터는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바다가 가까운 지역의 읍성들이 새로 축조되거나 개축되었다 .

 

이때에는 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성벽의 높이를 높이면서 옹성 (甕城 : 문의 양쪽에 쌓아

문을 공격하는 적을 방비하는 것 )과 치성 (雉城 : 성벽의 바깥에 네모꼴로 튀어나오게 벽을 쌓아 성벽에

바싹 다가선 적병을 비스듬한 각도에서 공격하게 하는 시설 )

해자 (垓字 : 성벽의 둘레에 도랑을 판 것 )를 시설하도록 중앙정부에서 감독하였다 .

 

, 지방의 수령들에게는 근무기간 중에 지켜야 할 근무지침으로 성을 보수하는 항목이 들어 있었다 .

또한 , 읍성을 쌓고 나서 5년 이내에 무너지면 죄를 삼고, 견고히 쌓으면 상을 준다는 규정도 마련되어 있었다 .

 

읍성들은 조선왕조의 마지막까지 존속되었으나 ,

1910년 일본에 의하여 읍성철거령이 내려져 대부분의 읍성들이 헐렸다 .

 

현존하는 읍성으로는 정조 때 축조된 화성 (華城 )이 대표적이며 , 이밖에 동래읍성 ·해미읍성 ·비인읍성

남포읍성 ·홍주성 ·보령읍성 ·남원읍성 ·고창읍성 (일명 모양성 흥덕읍성 ·낙안읍성 ·진도읍성 ·경주읍성 ·

진주읍성 (일명 촉석성 언양읍성 ·거제읍성 등이 있다 .

 

조선시대의 읍성은 내륙지방에는 비교적 큰 고을에만 있었고, 해안 근처의 고을에는 거의 모두가 있었다 .

읍성은 부 (((현의 행정구역단위의 등급에 따라 그 크기도 차이가 있었다 .

 

일정하지는 않으나 이런 차이는 주민의 수효와 관계되었으며,

큰 것은 3,000 () 이상 , 중간규모는 1,500 3,000  작은 것은 1,000 척에 못 미치는 경우도 있다 .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현 남부지역에 69 개소 , 동국여지승람 에는 95 개소 ,

동국문헌비고 에는 104개소의 읍성이 기록되어 있다 .

 

읍성은 치소가 위치한 성이므로 행정적 · 군사적 역할을 수행하였고 ,

성 내에 주민들이 거주하기도 하였으며 , 유사시 주민들의 입보처로 기능하고 있었다 .

 

따라서 읍성에는 반드시 각종 관아가 들어서 있었다 .

즉 성 내에는 동헌 (東軒 ) · 객사 (客舍 ) · 작청 (作廳 ) 등 행정을 담당하는 관아 시설이 위치하였고 ,

또한 각종 창고들도 자리하고 있었다 .

향교와 성황사가 읍성 내에 위치한 경우도 있었지만, 일반적으로는 이들 시설은 성 밖에 위치하였다 .

 

읍성은 대개 평지에 축조되거나 혹은 평지와 구릉을 연결하여 쌓았다.

구릉 내지 낮은 산을 일부 활용하여 성벽을 두른 경우에도 주요 행정 시설은 평지 면에 자리하고 있어 ,

읍성은 기본적으로 평지를 토대로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고려는 평지에 연접한 낮은 산에 입지한 점이 조선 읍성과의 차이점이라 할수 있다.

 

읍성은 외관청이 위치한 성이었고, 따라서 지방관이 파견된 주현에만 읍성이 설치되었다.

세종실록 (世宗實錄 )』「지리지 (地理志 )단계까지는 소수의 속현에 읍성이 존재한 경우가 있었지만 ,

이는 고려 시기의 유제였고 , 동국여지승람 (東國輿地勝覽 )단계 이후로는 주현에만 읍성이 설치되어 있었다 .

이러한 현상은 중국의 치소가 위치한 성과 동일한 반면 , 고려와는 이질적이었다 .

고려 시기의 치소는 향리 관청인 읍사(邑司 )를 의미하였고 ,

치소가 위치한 성은 주현과 속현 구분 없이 설치되어 있었다 .

 

 

마지막으로 읍성은 일부 지역에만 설치되어 있었다 .

동국여지승람 (東國輿地勝覽 )단계에 읍성을 설치한 군현은 전체의 절반에 못 미쳤고 ,

이러한 읍성 분포는 조선 후기까지 큰 변화 없이 지속되었다 .

 

또한 읍성은 특정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여 하삼도와 강원도 연해 지역 및 북쪽 국경 지대에 몰려 있는 반면 ,

내륙 지역에는 드물게 설치되었다 .

이러한 점은 군현에 치소가 위치한 성이 일반적으로 분포하고 있던 중국 및 고려와 상이하였다

 

일반적으로 방어와 행정이 분리되어 운영되는 조선의 사회구조 속에서

읍성의 분포는 지역과 군사적 긴장도에 따라 현저한 차이가 존재하고 있었다 .

 

조선 시기 일부 지역의 읍성은 폐기되고 일부 군현에 새로이 읍성이 축조되기도 하였지만 ,

전국적으로 볼 때 적지 않은 군현에 읍성이 설치되어 있었고 ,

이러한 현상은 조선 말기까지 지속되었으나

1910년 일본에 의하여 읍성 철거령이 내려지면서 대부분의 읍성들은 철거되기에 이르렀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