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유홍준 시, 시교실

유홍준- 喪家에 모인 구두들, 북천 까마귀

생게사부르 2016. 2. 29. 17:17

 
喪家에 모인 구두들/ 유홍준


 

저녁 喪家에 구두들이 모인다
아무리 단정히 벗어 놓아도
문상을 하고 나면 흐트러져 있는 신발들
젠장, 구두가 구두를
짓밟는 게 삶이다
밟히지 않는 건 亡者의 신발뿐이다
정리가 되지 않는 喪家의 구두들이여
저건 네 구두고
저건 네 슬리퍼야
돼지고기 삶는 마당 가에
어울리지 않는 화환 몇 개 세워놓고·
봉투 받아라 봉투,
화투짝처럼 배를 까뒤집는 구두들
밤 깊어 헐렁한 구두 하나 아무렇게나 꿰 신고
담장 가에 가서 오줌을 누면, 보인다
北天에 새로 생긴 신발자리 별 몇 개


                  시집 <喪家에 모인 구두들>, 실천문학사, 2004.

 

 

북천

—까마귀

 

어제 앉은 데 오늘도 앉아 있다
지푸라기가 흩어져 있고 바람이 날아다니고
계속해서
무얼 더 먹을 게 있는지,
새카만 놈이 새카만 놈을 엎치락뒤치락 쫓아내며 쪼고 있다
전봇대는 일렬로 늘어서 있고 차들은 휑하니 지나가고
내용도 없이
나는 어제 걸었던 들길을 걸어 나간다
사랑도 없이 싸움도 없이, 까마귀야 너처럼 까만 외투를 입

은 나는 오늘 하루를 보낸다
원인도 없이 내용도 없이 저 들길 끝까지 갔다가 온다

      

   

                1962년 경남 산청 출생.

                1998년《시와 반시》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喪家에 모인 구두들』『나는, 웃는다』『저녁의 슬하』, 시선집『북천-까마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