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벚나무 아래서 장만호

생게사부르 2020. 5. 1. 11:05



벚나무 아래서/ 장만호


1
물들은 일어나 한 그루 나무가 된다
어두운 흙 속에서 이내 출렁이다가
제 몸을 이끌어 거슬러 올라갈 때
물들은 여기 나무의 굽은 등걸에서
잠시 동안은 머물렀을 것이다

제 몸을 수없는 갈래로 나누고 나누어
나무의 등뼈와 푸른 핏줄을 통과할 만큼
작아졌을 때
공기의 계단을 오를 만큼 가벼워졌을 때
목질의 그릇에 담겨 잠을 자다가
물들은 술처럼 익어가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봉인된 시간을 열고 꽃들은 핀다

제 몸을 바꾼 물들은 나무의 눈망울이 되어
지상과 제 높이의 꿈을 견주어보며
몽롱하게,
다만 몽롱하게 제 향기에 도취해갔을
것이다
그래서 저 나무는 이처럼
백색의 광휘로 불타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2
여기 커다란 불기둥이 있네
몹시도 타오르다가
바람의 가는 뼈를 헤집고, 거기
제 몸을 날리는 차가운 불꽃들이 있네
때를 기다리는,
한 때 무섭게 가라앉은 물이었다가
제 꿈으로 불타오르는 뜨거운 몸이었다가
이제는 너에게 가고자 하는 바람에
흐들리는 수직의 물결,
그 수직의 물결을 따라
만천화우(滿天花雨)로 너에게 쏟아져
내리는
벚나무 아래서
곱게도 사람아,
네 얼굴이 향기처럼 붉다






사진; 2019. 진해 해양생태공원




2001. 세계일보 신춘 <水踰里>에서

시집:  무서운 속도, 랜덤하우스. 2008

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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