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흘러간다 성미정

생게사부르 2019. 11. 28. 12:53

 

 

   흘러간다/ 성미정


 

   깊은 물 속에 그가 살았습니다 누구도 그의 이름을 알
지 못했습니다 처음부터 이름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그도 다른 이들처럼 많은 이름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물결
이 바뀔 때마다 이름이 변하는 건 물속 나라의 오래된
관습입니다 때가 되면 누구나 낡은 이름을 버리고 새 이
름을 맞아야 합니다 가끔은 헤어지기 싫은 이름도 있었
고 감당하기 버거운 이름도 받아들여야 했지만 그는 이
곳의 관습에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유독 바람이 심하던
어느 밤이었습니다 그는 사용하지 못 한 새 이름을 놓쳐
버렸습니다 어찌나 물살이 거센지 움켜 잡을수 없었습니
다 이름을 잃은 벌은 가혹했습니다 그는 다음에 올 어떤
이름도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에겐 이름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가족과 친구들은 당황했습니다 그를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몰라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외톨이가 된 그
는 이름이 없는 게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남들이 쓰고 버
린 이름이라도 주워 달려고 애썼습니다 그에게 맞는 이
름도 없었을 뿐더러 사람들에게 조롱만 받았습니다 홀로
지내던 그는 자신의 몸이 예전보다 가볍다는 걸 느꼈습
니다 이름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도 서서히 눈치채게 되
었습니다 어느 새벽 그는 물결위로 떠 올랐습니다 이름
이 존재하지 않는 어딘가를 향해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흘러가면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찾게 되었습니다 흘러간
다는 것 그것이 그의 이름이었습니다

 

 

 

 

 

 

 

 

*        *        *

 

 

여자, 딸, 언니,누나, 아내, 엄마 며느리, 선생님... 

 

헤어지기 싫은 이름이 있었던가?

 

딱 맞는 이름은 영원히 갖지 못할 것 같은 예감

그럼에도 이 세상을 이름없이 살아간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므로

외톨이가 되어 지낼까 두려워 조롱을 받더라도 남들이 쓰고 버린 이름이라도 주워 달아야 한다

 

그러나 사실은 아무 이름이 없을 때

심지어 ' 자신' ' 자기' 라는 이름조차 버릴 때

사실은 가벼워지고 자유로와 진다는 거

 

감당하기 버거운 이름을 가지고도

한 세상 버티면서, 견디면서 흘러가는 것외에는 도리가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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