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최문자 편지

생게사부르 2019. 10. 28. 10:07

 

편지/ 최문자


 

어떤 자작나무
손목이 하얗다
몰래 캄캄한 편지를 쓰고 나오는 중이다

몰래 쓴 편지가 하얗다
어떤 감정이 흰색을 뒤집어쓰고
쓸 수 없는 데를 쓴다
물 한 잔으로 적실만큼 어떤 말을 하고 있다

봄인데도
편지는
지나간다
없어진다
떨어진다
툭툭
무슨 꽃처럼

그래도
나는 제법 잘 살고 있다

아침마다 여름 배춧잎처럼
입을 벌린다

종이가 구겨져도 우리는 알아본다
더 가늘고 더 안 보이고 더 누르는 희박한 글씨

몰래 입안에 가득가득 넣고 다니다
어떤 말들을
녹였을까?

슬픈 장면
펴 보지 않아도
하얗다

잃어버린 것 옆에서
잊어버린 것 옆에서
말라 죽은 편지
하얗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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