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황유원 비 맞는 운동장

생게사부르 2019. 5. 28. 00:00

황유원


비 맞는 운동장

 

 

 

비 맞는 운동장을 본 적이 있는가

단 한 방울의 비도 피할 수 없어

그 넓은 운동장에서 빗줄기 하나 피할 데 없이

누구도 달리지 않아 혼자 비 맞는 운동장

어쩌면 운동장은 자발적으로 비 맞고 있다

아주 비에 환장을 한 것처럼

혼자서만 비를 다 맞으려는 저 사지(四肢)의 펼쳐짐

머리 끝까지 난 화를 식히기 위해서라면

운동장 전체에 내리는 비로도 부족하다는 듯이

벌서는 사람이 되어 비를 맞고
벤치에 앉은 사람이 되어 비를 맞고

아예 하늘보고 드러누운 사람이 되어 비를 맞다가

바닥을 향해 엎드려 뻗쳐 한 사람이 비를 맞아 버린다

혼자 비 맞고 있는 운동장, 누가 그 쪽으로

우산을 든 채 걸어 들어가는 걸 본적이 있다

검은 우산을 들고 있어서 멀리서 보면 무슨 작은

구멍 같아 보이는 사람이 벌써 몇 바퀴째

혼자서 운동장을 돌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도 비 맞으며 뛰놀진 않는 운동장

웅덩이 위로 빗방울만 뒤노는 운동장에서

어쩌면 운동장 구석구석에 우산을 씌워주기 위해

어쩌면 그건 그냥 운동장의 가슴에 난 구멍이

빗물에 이리저리 떠다니고 있는 건지도 몰랐지만

공중을 달려 온 비들이

골인 지점을 통과한 주자들처럼

함께 운동장 위로 모두 엎질러지는 동

고여서 잠시, 한 뭉테기로 휴식하는 동안

우산은 분명 운동하고 있었다

혼자서 공차고 노는 사람이

혼자서 차고

혼자서 받으러 가듯

비 바람에 고개 숙이며 간신히 거꾸로

뒤집어지지 않는 운동장이었다

상하전후 좌우로 쏟아지는 여름의 십자포화를 견디며

마치 자기가 배수구라도 되겠다는 양

그 구멍 속으로 이 시의 제목까지 다 빨려 들어가 버려

종이 위엔 작은 구멍하나만이 남아 있을 때까지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자신을 소멸시키겠다는 듯이

가까스로 만들어 낸 비좁은 내부 속으로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소

집중시키고 있었다

 

 

            

                         < 세상의 모든 최대화 > 2016.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