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이성복 11월

생게사부르 2018. 11. 10. 10:48

11월


이성복


1.
등 뒤로 손을 뻗치면 죽은 꽃들이 만져지네
네게서 와서 아직 네게로 돌아가지 못한 것들
손을 빼치면 온통 찐득이는 콜타르 투성이네
눈을 가리면 손가락 사이로 행진해 가는 황모파
승려들, 그들의 옷은 11월의 진흙과 안개
김밥 마는 대발처럼 촘촘한 날들 사이로 밥알
같은 흰 꽃 하나 묻어 있었네 오랜 옛날 얘기였네

2.
그대 살 속에 십촉짜리 전구 수천 빛나고
세포 하나하나마다 곱절 크기의 추억들
법석거리니 너무 어지러워 눈을 감아도
환하고 눈뜨면 또 어지러워 늘 다니던
길들이 왜 이리 늙어 보이는지 펼쳐놓은
통치마 같은 길 위로 날들은 지나가네
타이탄 트럭에 실려 시내로 들어가는 분홍빛
얼굴의 돼지들처럼, 침과 거품 흐르는 주둥이로
나 완강한 쇠창살 마구 박아 보았네 그 쇠창살
침과 거품 흘러내려 흰 고드름 궁전 같았네

 

3.

11월, 천형의 땅 삶긴 번데기처럼 식은

국물 위에서 11월, 기다리지 않았으므로

노크 한번 하지 않았으므로 11월, 미구에

감긴 눈으로 쏟아져들어올 흰 눈 흰 밀가루 

포대 터져 은박지로 구겨질 겨울 11월,

이젠 힘이 부쳐 일어서지 않는 성기

포르노처럼 선명한 욕망의 밑그림 11월,

삼켜지지 않는 뜨거운 수제비알 같은 여름

 

 

4.

겨울의 입구에서 장미는

붉은 비로드의 눈을 뜨고

흰 속눈썹처럼 흔들리는 갈대

돼지 멱따는 소리로 우는

가을 꽃들의 울음을 나는

듣지 못한다 초록 네온사인

'레스토랑 청산' 위로 비가

내리고 나는 세상의 젖은 몸

위에 ' 사랑한다' 라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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