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이윤학 이미지

생게사부르 2018. 10. 25. 07:43

이미지/이윤학


삽날에 목이 찍히자
뱀은
떨어진 머리통을
금방 버린다

피가 떨어지는 호스가
방향도 없이 내둘러진다
고통을 잠글 수도꼭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뱀은

쏜살같이
어딘가로 떠난다

가야한다
가야한다
잊으러 가야한다

 

 

*     *      *

 

 

시 공부 할때 ' 객관적 상관물'의 예시로 자주 인용되는 시입니다.

물을 틀고나면 물흐름 따라 구불거리는 호스의 꿈틀거림, 꼬여서 막힌데가 있으면 터져서 폭발하기도 하는

자주 보는 광경인데도... ' 삽날에 목 찍힌 뱀이라네요'

여러 시인들의 감상이 있는데 우리샘(유홍준)과 이영광 시인과 두분 감상만 곁들여 봅니다.

이전에도 여러차례 언급하셨지만 지난 화요일 시 합평회에서 이 시 재차 소개하시면서 이윤학 시집 읽어보라

과제 내셨거든요.

제목 그대로 이미지가 선명합니다

 

 

 

 

 

수압이 센 수도꼭지에 호스를 끼우고 물을 틀어 본 사람은 안다. '방향도 없이' 내둘러지는 고무호스에 물벼락을 맞는 기분! 우리는 모두 '고통을 잠글 수도꼭지'를 찾아 얼른 수돗물을 잠글 수밖에 없다. 누군가로부터 가해를 당하고 (삽날에 목이 찍히고) '가야 한다/ 가야 한다/ 잊으러 가야 한다'고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어딘가로 내빼는 뱀. 그 징그럽고 무서운 뱀도 이렇게 삶과 죽음 앞에선 안타깝고 슬프고 처량하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한 번 둘러 봐야지. 직장을 잃고 가족을 잃고 연인을 잃고 '머리통 떨어'져 아파하는 내 이웃은 없는지!

 

유홍준 시인

 

 

목 떨어진 뱀의 발버둥에 비유된 인간의 고통은 어떤 것일까. 무심코 놓쳐버린 호스처럼 길길이 날뛰는 통증을 틀어막을 뚜껑이 없다. 저 몸엔 어찌하여 손도 발도 없는 걸까. 잊지 못하면 살지도 못하는데, 살려주세요, 하고 조아릴 머리도 빌어볼 입도 없다. 무엇이 이 살풍경을 없는 입으로 말하게 하는 걸까.

 

시인이 지독한 건지 시가 본래 그런 것인지 잘 알 수 없지만, 어떤 시인들은 정말로 제 손으로 제 몸을 찌른다. 나는 나의 크고 작은 비참을 잊고 홀린 듯 이 참상을 바라본다. 고통의 약은 더 큰 고통, 망각이야말로 위로인가. 사실 우리 모두는 동업자에게서 가장 큰 힘을 얻는가 보다. 동병상련, 동병상련, 그래도 세상은 동병상련의 공동체여야 하나 보다.

 

이영광 시인 / [출처 : 중앙일보] 2012.05.23 '시가 있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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