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박세랑 뾰족한 지붕들이 눈을 찌르고 귀마개를

생게사부르 2018. 10. 9. 01:06

박세랑



뾰족한 지붕들이 눈을 찌르고 귀마개를 뺐더니 아무도 나한테 말을 안 걸고


세면대 속 출렁이는 비명을 씻어내자
앞니가 두개나 달아난 내가 뚱하니 서 있네
누구한테 자꾸 털리고 다니니?
내가 나를 털었는데요 어젯밤에 발작이 있었거든요
더러워진 손바닥과 구린내 나는 발가락을
우리집 마녀에게 내민다
젖꼭지 캄캄한 엄마가 냄새를 맡고 뛰쳐나와
불심검문처럼 내 몸을 구석구석 더듬다
내일 쯤 잡아먹으면 끝내주겠지?
먼지 쌓인 악몽이 내 피를 한차례 휩쓸다 간다
생각이 엉킬 때마다 머리카락은 무서운 속도로 자라고
검은 수초가 되어 발목을 넘어뜨리고
고무줄처럼 질긴 얼굴을 누가 잡아당기면
늘어나고 찢기는 나의 일상들
불안을 쪼그맣게 오려서 알록달록 꾸민다
미모를 갱신한 내가 약국으로 놀러간다
내 인생 하류를 통과하는
소화제를 한 움큼씩 집어삼키면
우와 시원하다! 몸에 찍힌 발자국들이 욱신거리고
눈 코 입 깨진 자리마다 후후 불면서
하트 모양 스티커를 붙이면 자신감이 생긴다
예쁜건 내 잘못이에요!
열등한 것들은 더 열등한 것들을 만나해결하라고
화장실 물을 시원하게 내려주면
가난하고 뻔뻔한 걸 낳아 놓고

미역국을 사발로 퍼먹은 게 누구더라?
마녀에게 빠진 이를 드러내며 비웃어야지
굴러다니는 깡통처럼 신나게 밑바닥을 보여줘야지


                     - 문학동네 2018. 가을 9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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